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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아스가르드 형제]윤회전생

토르 라그나로크 엔딩 이후. 1 시점의 자신과 형을 보게 되는 로키 이야기.

시하님 리퀘. 라그나로크 엔딩 이후에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자신들을 보게 되는 로키 이야기...인데 생각해보니 제가 토르 1은 어디서 무슨 대사가 나왔는지 다 파악할 정도로 보지 않았더라고요:3 군데군데 캐붕이나 설정이 틀린 부분이 있어도 이해해주십사…



종말 뒤에는 조금은 편히 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로키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탄식했다. 매트리스는 걸터앉자마자 구름처럼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아스가르드의 왕자로서 아홉 세계 가운데서도 최고급품만을 접하며 살아온 그마저도 일순 움찔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로키는 이 우주선의 전 주인을 떠올렸다. 그랜드마스터. 쓰레기로 이루어진 행성의 왕. 그러고 보면 이 방, 아마도 그랜드마스터가 쓰던 방인 것 같다고 했더랬지. 그 말을 듣자마자 형이 안색을 바꾸며 자신은 이 방을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던 것도 덩달아 떠올랐다.  ―오, 가엾은 형. 아무리 그랜드마스터라고 해도 딱히 아무 데서나 흘레붙은 개처럼 떡을 쳐대지는 않아. 이 우주선은 애초에 목적이 다르다니까? 레저용이 아니라 업무용이었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글쎄. 그걸 내가 꼭 이야기해야만 할까? 형이 꼭 알고 싶다면 이야기하겠지만-아, 필요 없어? 고마워. 설명하는 수고를 덜었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이 방에서 자도 되겠지? 싫어? 내가 여기서 잔다는 건 이 우주선에서 여기가 제일 안전한 곳이 될 거란 소린데?  …그 외 기타 등등―결론부터 말하자면, 로키는 함선에서 가장 훌륭한 방의 공동 사용자가 되었다. 기실, 홀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가끔 이 방의 진짜 주인이 돌아올 때마다 지독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행성이 하나 끝장나는 미증유의 재앙 이후에도 사람이 살아야 하고,  사는 데에 온갖 일이 따르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멸망한 뒤의 난장판이었기에 평화로울 때보다도 일은 몇 배나 더 많았다. 꽤나 길었던 피난 생활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게 고향의 영원한 멸망과 방황이라는 건 강인한 아스가르드인들에게도 크나큰 충격이었겠지. 방황 끝에 돌아와 왕위를 잇게 된 왕자는 제 부상을 치유하기보다도 상처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함내를 바삐 돌아다녀야만 했다. 

뭐, 원래 아홉 세계를 돌아다니며 트러블에 대처하는 일에는 익숙했으니까. 안대를 만지작거리며―한쪽 눈을 잃은 뒤 새로 생긴 습관인 듯 했다―토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 음색에 피로가 묻어나는 걸 로키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형이 잘 하는 것은 전장의 맨 앞에 우뚝 서서 군림하며 마음의 지주가 되어주는 일이었지, 상처입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세심하게 돌보는 일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강인한 아스가르드인들이라면 언젠간 이 피난선 안을 저희들 삶의 새로운 전장으로 삼아 살아갈 수도 있을 터였고, 그럼 토르도 익숙지 않은 역할에서 해방되어 다시 그 자리에 상징이 되어, 기둥이 되어 우뚝 서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게 지금이 아닐 뿐. 목숨을 걸고 달려온 전사에게 마땅한 휴식이 주어지기에는 앞으로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뿐.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입으로 뱉은 말에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점액처럼 무거웠다. 로키는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질량을 지닌 구름 같은 감촉이 등에서부터 온 몸을 감쌌다. 하아, 로키는 허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드물게, 약간 열기를 띤 한숨이다.  피로로 인한 미열.  아스가르드를 탈출한 뒤로 며칠간, 거의 쉬지 않고 일해온 건 로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재차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는 분통이 터져서였다. 비슷한 정도로 일했음에도 토르는 멀쩡한데 자신은 아니라니, 이것도 자신의 태생 때문일까. 이제 와서 태생에 분통을 터트릴 만큼 새파랗지는 않다고 생각했다만. 로키는 한쪽 손을 허공에 들어 바라보았다. 창백한 손이다. 주홍빛 조명에 물들어 아주 조금 핏기가 도는 듯도 보이지만, 전부 착각. 전부 거짓. 한때 그렇게 믿었던 것 모두.

로키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이건 영광의 상처라지 않았느냐.』

『정말로 영광의 상처라면 치료실로 갔겠지요, 전하.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언제 들어도 그 말솜씨는 전설의 명검마냥 날카롭구나. 아우야. 그리고 그리 부르는 건 그만두어라.』

로키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조금 색이 바랜 듯한 갈색과, 익숙한 금빛. 그리고―그는 숨을 약간 삼켰다.

"……형."

그리고, 나. 로키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잘 다듬어둔 손톱 끝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빼족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기는 한데 깨지는 않는다니, 꿈이 아니란 걸까. 아니면 자신도 다른 신들처럼 어느새 꿈이 아닌 꿈의 부스러기라도 꿀 수 있게 된 것일까. 어찌되었건 한동안은 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에, 로키는 방 한 구석에 몸을 기대었다.

'천 살이 넘은 이후로는 얼굴이 거의 안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 지금 보니 꽤 어린 티가 남았어. 보아하니…대관식, 전인가.'

대관식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자 속이 지끈 아파왔다. 토르의 대관식. 모든 것이 뒤집어지기 시작한 날. 아스가르드의 금빛이 저에게 있어 자랑스러움 외의 의미를 지니게 된 날. 어렴풋이 안개처럼 끼어있던 의혹이 눈을 가리고 손발을 붙잡는 아프게 차가운 확신의 눈보라가 된 날. 

『뭐, 뭐야. 토르.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할 건 없잖아. 그냥 장난인걸. 그리고, 형이 아스가르드의 왕이 될 거란 사실은 거의 확실한―』

『그렇다 해도.』

아직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의 청년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지금 보니 이럴 때의 얼굴은 굉장히 아버지와 닮았구나. 과거의 제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상기되어 있는 걸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로키는 문득 생각했다. 형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저런 시선이 자신을 향하면 마치 전류라도 몸에 흐른 듯 모든 생각이, 행동이 멈추게 되던 건 아마도 그 때문이었으라고.

『그렇다 해도, 나는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이 싫다. 하나뿐인 동생이 아니냐. 왕위에 오른 후라 해도, 네가 나를 남 대하듯 하면 참으로 슬플 것 같구나.』

『형……』

멍청이. 로키는 형을 바라보며 뺨을 붉히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차가운 매도를 던졌다. 저 뒤에 숨은 의미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이건만 애정과 동경에 눈이 멀어서는. 

그 자식은 지금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암암리에 선언하고 있는 거야. 너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똑같이 아스가르드의 왕자일 터이건만. 왕좌는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는. 나머지 한 명의 상대에게, 경쟁자에게 그럼에도 너는 나를 사랑하라고-남처럼 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거라고. 

처음부터 내가 거절하리라곤 생각도 안 하고 있으면서. 그런 건 명령이나 다름없건만, 마치 부탁처럼.

마치 타고난 절대자처럼.

로키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뒤에 이어질 내용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말한 이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말의 이면에 숨겨둔 의미마저 알아챌 정도로 총명한 둘째 왕자는, 그럼에도 그 명령과 다를 바 없는 부탁을 결코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위화감과 열등감을 숨쉬듯이 제 안에 갈무리한 채, 미처 다 숨기지 못한 흥분만을 뺨에 발갛게 띠운 채.

『……알았어. 형이 원한다면. 위대한 토르. 나는 언제 어디서라도 형의 아군이야.』

그럴 터였다. 그러지 못했지만. 로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촛불빛이 비친 금빛이, 이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못 볼 그 빛이 이상하게 지금은 눈에 역했다.

"…남이 자는 얼굴을 빤히 보고만 있다니 악취미인걸. 폐하."

눈을 뜨자마자 보인,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로키는 숨쉬듯 악담을 내뱉었다. 꿈 속에서 너무도 소리치고 싶어 입을 근질근질하게 하던 말이라 그럴 터였다.  척안의 사내-로키의 형이자, 이제는 그의 왕이 된 이가 놀란 듯 한쪽만 남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 부르지 말라 했잖냐."

이번에는 로키가 눈을 동그랗게 뜰 차례였다. 

"기억하고 있었어?"

"잊을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

"그래. 얼굴은 꽤 변했던데."

"세상 모르게 깊이 자고 있다 싶더니, 옛날 꿈이라도 꾼 게냐?"

…그래서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던 게로군. 로키는 내심 욕설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남자에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다니, 주는 것 없이 분했다. 잘 오지도 않는 주제에 하필 오는 타이밍이 어쩌면 이렇담. 로키의 속도 모르고 망할 형은 속없이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다. 신경쓰는 건 나 뿐이지. 그에게 아스가르드에 있던 시절 꿈을 꾸었노라고 말하면 저 까닭 없이 맘 편해 보이는 웃음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일순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아마도. …좀 앉지 그래? 계속해서 올려다보자니 목이 아픈데."

 소리도 없이 매트리스가 또 한명의 몸을 받아들였다. 이 침대, 지나치게 반동이 없어서 기분 나쁘단 말이야. 무어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토르가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의, 사람 속을 술렁이게 하는 웃음이 고작 침대 매트리스 하나에 꺼졌군. 나는 나름 고민까지 했는데. 어쩐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꿈을 꾸었던 게냐?"

"이 화제 아직도 계속되는 거였어?"

"네가 싫다면 안 하겠지만. 네가 잠든 얼굴을 본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건 단순히 형님이 여기에 자러 온 지 엄청나게 오래되었기 때문이야. 로키는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어찌어찌 눌러참았다. 여하튼 최근 들어서는 토르의 행동 패턴을 읽기가 힘들었다. 이리 가겠다 싶으면 저리 튀고, 저리 가겠다 싶으면 이리 튀고. 천 년을 함께하며 알아왔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모르는 새에 새로운 생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는 건-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꿈 속의 자신과 그리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절대로 먼저 자신을 돌아봐주지는 않을 절대자의 눈치만을 살피고. 

"……옛날 꿈을 꿨어."

형의 한쪽 눈이 안대에 가려져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로키는 생각했다. 저쪽 눈으론 절대, 지금의 로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옛날―"

토르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려진 한쪽 눈은 로키의 표정을 읽어가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로키가 그 기색을 살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절대자처럼.

"그래, 옛날. 다시는 못 돌아가는."

가시 돋친 말투로 못박은 것은 일부러였다.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지금의 자신조차 꿈속에서 보았던, 홍조 띤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로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멋대로 두 잔의 술을 따라 한 잔을 형에게 건넸다. 사카아르의 술은 하여간 쓰고 독해서, 입에 머금는 순간 추억이고 아픈 기억이고 한 번에 뇌수 구석으로 밀어낼 만큼 강했다. 어디의 누군가가 과거를 잊기 위해 한때 그곳을 거처로 삼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토르에게도 그러하기를, 로키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바랐다.

종말 뒤에는 조금 더 편해질 줄로만 알았건만.

슬금슬금 밀고 올라오려는 상념 위에 술로 뚜껑을 덮으며, 로키는 악담 섞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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