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라그나로크 이후 시점. 두 그랜드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딘슨 형제. 커플링 기미는 별로 없는, 형제의 인식 차이 이야기입니다. 당연하지만 토르 라그나로크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어쩔 도리 없이 미친 놈이었지."

토르가 문득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스가르드가 사라지고도 며칠이 지난 뒤였다. 혹시 저거 내 얘기인가? 로키는, 토르의 그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은 유일한 이는 일순 눈썹을 찌푸리며 제 형 쪽을 돌아보았다. 별 표정의 변화 없이 술을 홀짝이는 옆모습이 보였다. 하필 보인 게 안대로 가려진 쪽의 얼굴이었기에, 확신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아무리 이 인간―아니 신이 오딘슨 아니랄까봐 무신경하게 남 속을 긁어놓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를 3인칭으로, 그것도 과거형으로 말하지는 않겠지. 

…어쩔 도리 없이 미친 놈이라는 평가 자체는 아쉽게도 확신을 갖고 부정하기 힘들 것 같았다.

좋아. 침착하자. 침착하자고. 로키 오딘슨. 로키는 깊이 심호흡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맞는 느긋한 시간이었고, 뭐, 굳이 원한다면 그 앞에 '형제의' 라는 단어를 덧붙여주어도 좋을 터였다. 지나친 지레짐작으로 간만의 휴식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로키는 소매 바깥으로 꺼낼 뻔했던 단검을 도로 집어넣곤, 그의 형에게 질문했다.

"누굴 이야기하는 건데?"

술병 뚜껑이 날아왔다. 로키는 가볍게 그것을 받아내고선 제 형을 카악 쏘아보았다. 오, 미안. 아우야. 술이 들어간 탓에 게 있는 네가 진짜인지 아닌지 너무도 헷갈리지 뭐냐. 킬킬대는 형님, 아니 형놈을 내려다보며 로키는 이 재미없는 장난이 앞으로 오십 년쯤 계속되기 전에 얼른 이놈을 찌르고 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꽤 진지하게 했다. 

"사카아르의 그 미친 늙은이 말이다. 뭐라고 했더라. 그, 그."

"그랜드마스터  말이지."

이번에는 토르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졌다. 어이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건 정말 간만에 보는걸. 토르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과는 반대로 로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조금 전의 더럽게 재미없는 장난을 없던 걸로 해주어도 좋을 정도였다. 토르는 짧게 쳐진 뒷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본 뒤 한번 진저리를 쳤고, 로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적지근한 동생의 반응에 토르가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내 말에 그리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군?"

"글쎄, 형도 알다시피 나는 그곳이 딱 체질에 맞았으니 말이야."

"오, 로키."

"비꼬는 거 아니야. 그랜드마스터는―그 늙은이는 확실히 좀 변덕스런 점이 있긴 했지만, 그런 자를 처음 접해보는 것도 아니었는걸. 그런 타입은 패턴만 알면 은근 대하기 쉬워."

로키는 그랜드마스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황급히 주워담았다. 형이 재차 제 뒷머리를 쓸어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완전히 무의식이리라. 로키 또한 아스가르드인으로 자라왔으니만큼, 긴 머리카락이 아스가르드의 전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장난을 두 번 치는 건, 게다가 그걸로 상대가 침울해지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니었다. 장난이란 모름지기 상대를 팔딱팔딱 신선하게 뛰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게 로키의 신조였다. 물론, 그게 재미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는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토르는 금세 까끌까끌한 뒷머리에서 손을 떼곤 로키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처음이 아니라니? 그런 미친놈이 이 우주에 또 존재했단 말이냐?"

"――"

로키는 잠시 제 형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딘의 수염에 걸고, 맙소사. 그런 미친놈이 또 있었다니! 라고 생각중이겠지.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빤히 보였다. 친애하는 형, 나의 왕이시여. 그렇게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여서는 앞으로 고생할 게 뻔하군 그래. 제 속을 털어놓아 이 기대에 찬 눈에 경악과 실망을 불어넣어주면 어떨지 로키는 아주 잠시 망상해 보았다. 나쁘지는 않지만, 뒷일이 걱정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원 패턴이었다. 그의 형은 슬슬 경악과 실망에 익숙해져 가는 참이었다. 지루해진 장난만큼 하찮은 것은 또 없는 법이다. 로키는 속내를 말하는 대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고민은 매우 짧았고, 로키가 그동안 저렇게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토르는 모를 것이다. 거짓말은 숨을 쉬듯이 편했다.

"형, 우주는 넓어. 힘이 있고 기분파인 주제에 변덕스럽기까지 한 권력자는 별의 수만큼이나 존재하지."

암암리에 너는 모를 것이라고 못을 박는 듯한 말투였다. 기실, 토르는 모를 터였다. 지금은 아스가르드와 함께 불타버렸을 터인 그들의 누이 또한. 그들은 한 번 정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자들이었다. 하나는 온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서라면 시체뿐인 왕국의 왕이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또 하나는 거기에 맞서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제 한쪽 눈과―고향 별까지도 날려버렸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지독히도 닮은 남매였다고 로키는 내심 혀를 찼다. 극과 극인 듯 보이면서도 둘은 기어코 같은 핏줄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아버지도 꽤 비슷했을 텐데 말이야.'

왜 자신이 보기에 그는 그랜드마스터와 그리 다를 것이 없어 보였을까. 로키는 새삼,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을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기실, 로키는 그랜드마스터를 대하길 예전에 아버지 대하기와 그리 다를 바 없이 했고, 그 전략은 꽤 잘 통했다. 위대한 주제에 언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는 위험물이었지만, 기분만 잘 맞춰주면 가장 큰 방벽이 되어 줄 권위였다. 형이 없었다면, 쓰잘데기 없는 기대가 없었더라면 이렇게도 살아가기는 쉬웠던 게다. 그게 유쾌하면서도 허무했다. 

"정말 보기 드문 미친놈이었단 말이다. 배신하면 가족도 잔혹하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죽여버리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었는데―맙소사. 그런 놈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고?"

"그런가? 생각보다 같이 지낼만 했는데. 비위만 잘 맞춰주면 괜찮다니까. 오히려 기분 좋을 땐 잘 해주니 늘 뚱한 자들보다는 기분이라도 좋아지지."

로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모르게 찬 웃음이 배었다. 이런,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하지만 가족도 적이 되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평생 빛을 못 보도록 가둬버리고, 직속 부대를 죽을 게 뻔한 싸움에 보낸 뒤 그 기록마저 묻어버리고, 아들이 한 번 대들었다고 홀랑 벗겨 다른 세계로 추방한다는 점에서 대체 그들의 위대한 아버지와 쓰레기 행성의 미친놈은 무엇이 달랐다는 것일까.

토르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시선이 불편했다. 뱉고 싶은데 뱉지 못할 것이 괴어 있어 더 그럴 터였다. 로키는 길게 한숨을 쉬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리네. 난 먼저 자러 갈게. 형도 지나치게 많이 마시지 말라고."

로키는 그대로 방 밖을 나섰다. 오늘은 푹신한 특급 침대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괜한 화제를 꺼내서는. 망할 형. 언젠가 자는 등을 힘껏 걷어차 침대에서 떨어트려주고 말 테다.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는 로키의 등에 한 쪽밖에 남지 않은 시선이 꽂혀 있었다. 근질근질했다. 마법으로 훅 사라져버릴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게 안 내켰다. 거짓말로 도망쳤다간 조금 전에 했던 거짓말까지 함께 들통나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한쪽 눈을 잃은 뒤의 형은 어쩐지 없어진 눈구멍으로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한 느낌을 풍길 때가 잦았다. 

마치 아버지처럼. 바로 지금처럼.

"……그렇게 느끼고 있었나, 로키는."

로키가 선실 문을 나서고, 문이 닫히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토르는 툭 중얼거렸다. 잠시 놓고 있었던 술은 그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입에 머금어도 뭉근하여, 조금 전처럼 칼칼하게 뇌수를 자극하는 맛은 거의 날아간 뒤였다. 그는 대신 조금 전, 자신의 아우가 짧은 침묵 사이에 보였던 표정을 떠올렸다. 꽃이 피듯이 활짝 웃기 직전, 아주 짧은 그림자를. 로키는 슬슬 자신이 거짓말하기로 결심했을 때 얼마나 흡족하게 웃는지를 자각해야 할 거라고 토르는 생각했다. 물론, 가르쳐줄 생각은 없었다. 

재차 머금은 술이 여전히 미지근했다. 토르는 혀를 차며 술을 협탁 위에 올리곤 그대로 침대에 상반신을 던졌다. 

"하여간, 허무한 일이군."

모르겠다. 솔직히, 그들의 길은 굉장히 옛날부터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로키에게는 황금의 도시에서 지냈던 지난 천년의 세월이 그러했던 게다. 같은 성에서 살고, 같이 놀고 같이 싸우며―같이 살지는 못했다.

 토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 쪽만 남아 여전히 익숙지 못한 시야 대신, 온 몸을 덮어오는 암흑은 익숙하여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을 기반으로 썼던 건데 원형이 거의 안 남았네요.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 씨가 그랜드마스터를 오딘과 비슷하게 생각했다고 말한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어서 그 해석을 기반으로 생각했던 이야기입니다. 로키가 생각했던 오딘은 그랜드마스터와 마찬가지로 화내면 무섭고 비위를 잘 맞춰서 호감도를 따내야 할 상대였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오딘 참 자식농사 안타깝게 지었다 싶어서요. 약간은 자업자득이지만. 뭐 똑같이 키워도 애 성격에 따라 부모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를 떠나 인식의 차이죠.

결론: 육아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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