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잉크 냄새가 스쳤다. 유시스는 무심결에 교실 저편을 바라보았다. 시야 한구석에 짧은 녹발이 들어왔다. 만지면 까슬까슬할 것처럼 짧은 머리다, 머리 스타일도 꼭 주인 성질을 닮아선. 유시스는 턱을 괸 채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의 주인-마키아스 레그니츠는 당황한 듯 몸을 제 자리에 못 두고 있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유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지 몇 달 안 되기는 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마키아스는 늘 자로 재기라도 한 듯 똑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소년이었다. 그야말로, 너무 똑발라서 가끔은 보고 있는 사람이 지칠 정도로. 그 이변이 놀라운 건 유시스만이 아니었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칠판 앞에서 제국 도력 기술의 발전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토마스 교관이 수업을 잠시 멈추고 마키아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그니츠 군. 무슨 일이지요?"

"아, 저, 그게……"


마키아스는 드물게도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멋적은 듯 얼굴을 붉혔다. 유시스가 있는 쪽에선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만년필에서 잉크가 터져서……수업을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잉크가요? 저런……"


유시스는 힐긋, 책상 아래로 떨궈진 마키아스의 두 손을 보았다. 손끝에 여기저기 검은 잉크 얼룩이 들어 있었다. 조금 전에 났던 잉크 냄새는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토마스 교관은 마키아스의 자리 앞에서 떠나질 않고 그의 만년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꽤 앤티크한 만년필이네요. 레그니츠 군의 것인가요?"


낡아빠진, 을 어찌어찌 좋게 말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 유시스는 속으로 조금 심술맞게 그 말을 평가했지만, 어쩌면 토마스 교관은 진심으로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동시에 했다. 토마스 교관이 슬쩍 손에 든 만년필은 잉크에 더럽혀져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2-30년은 되어 보이는 물건이었으니까. 


토마스 교관의 미적 기준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건 토르즈 사관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단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것. 보통 사람들이라면 낡아빠진 고물이라 평할 만한 것을 '역사의 흔적이 느껴지는 일품' 이라 평할 남자가 그들의 역사학 교관이었다. 마키아스 또한 저희들의 교관이 그런 남자란 걸 잘 알고 있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그게 자기 일이 되면 얘기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토마스 교관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던지, 답지 않게 조금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아, 저. 아뇨. 제 것이……아니, 이제는 제 것이 맞겠군요. 아버지께서 쓰시던 물건이었습니다. 이 학교에 들어올 때 물려받아서."

"칼 레그니츠 지사가 쓰던 물건이란 말인가요!"


…아차. 하고 마키아스가 아주 잠시 몸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토마스 교관은 이제 완전히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알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건 분명히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 일하는 교관이라면 그렇게 누가 쓰던 물건 같은 거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유명인에 굶주리진 않았을 텐데. 어쩌면 제도 지사의 숨겨진 팬이라도 되는 걸까. 


유시스는 여전히 턱을 괸 채 그 모양을 가만히 응시했다. 주변의 급우들은 모두 '아, 오늘 진도 나가기는 다 텄구나.' 하고 포기한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도 근대사를 먼저 배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 마키아스는 제 만년필 하나가 수업을 망쳤다고 한동안 허둥대었다. 딱히 안 그래도 되는데. 자의식 과잉 아니야, 레그니츠? 괜스레 속으로 밉살맞은 말을 중얼거려 보곤, 유시스는 폭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밖에 못 하는 걸까. 딱히 누구에게나 착한 아이일 필요는 없고, 그게 저 소년 상대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만-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멋쩍어 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목에 작은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


"……물려받은 거 아니지. 그거."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작스런 유시스의 말에 마키아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예전처럼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대는 사이가 아니게 되었다곤 해도, 아니, 필설로 했다간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굉장한 사이가 되었다곤 해도-여전히 그들이 평소에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그것보다 약간 더 가시돋혀 있었다. …아니, 일부러 가시돋친 태도로 대하려 하는 건 자신 뿐일지도 모른다고 마키아스는 생각했다.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반응에 이젠 그리 신경도 안 쓰이는 듯 눈짓으로 마키아스의 손 부근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거 말야. 이젠 잉크는 안 터지는 모양이군."

"……음? 아, 아아."


유시스의 시선 끝에는 낡은 만년필이 있었다. 조금 전, 학원제 스케줄을 메모하기 위해 잠시 꺼낸 것이었다. 동시에 마키아스는 그 자신조차 잊고 있던 몇 달 전의 해프닝을 꾸물꾸물 머릿속 한구석에서 꺼내 보았다. 익숙지 않은, 게다가 낡은 만년필을 다루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던 때의 일이었다. 


"지금도 가끔 터지긴 해. 전처럼 크겐 안 터지지만……그나저나, 용케 기억하는군. 우리 그 때 별로 사이 안 좋았잖아."


유시스는 대답하는 대신 말간 시선만을 마키아스에게 보냈다. ……큼큼. 마키아스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 싸움은 거의 맨날 내가 걸었다. 왜. 그래도 그 땐 드잡이하는 정도는 아니었잖아. 바레아하트 다녀온 다음이었고. 치사한 녀석. 


"여, 여튼. 갑자기 내 만년필은 왜?"

"신경 쓰였으니까."


유시스는 손을 뻗어 만년필과, 그것을 쥔 마키아스의 손을 함께 제 앞으로 끌어왔다. 


"아마 넌 몰랐던 것 같지만. 그 만년필, 아무리 봐도 망가진 거였고."


만년필 끝은 촉이 살짝 휘어져, 한껏 더럽혀져 있었다. 


"나라면 아들이 새 학교에 입학할 때 그런 만년필을 물려주진 않을 것 같았거든. 차라리 아무 것도 안 준다면 몰라도."

"……귀신 같은 놈."


마키아스는 툭, 악담을 뱉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을 때 뒤에서 흘긋 보고 그걸 다 알았단 말이지. 제도의 집을 나설 때,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잉크가 말라붙은 만년필을 가지고 나왔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정말 별 것 아니었는데, 그냥 서랍 정리를 하다 나와서, 버려야겠다고 내놓은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집을 나설 때 그게 그렇게 눈에 밟혔더랬다. 만년필 같은 건 생전 써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하여간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났다. 잉크를 적시면 글씨가 갈라졌고, 뚜껑을 잘못 열면 줄줄 잉크가 흘렀다. 잘 해야지 했는데 늘 어딘가 새어 줄줄 흐르던 모습이 꼭 저 자신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차마 버리질 못했더랬다.

소태를 씹은 듯 확 구겨지는 마키아스의 얼굴을 보곤, 유시스는 쓰게 웃었다. 


"새 걸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내가 주는 것따위 필요 없을 거라고 하겠다 싶었지."

"잘 아네. 지금 준대도 안 받을 거야."

"알아. 줄 생각 없어."

"……그럼 왜 갑자기 만년필 이야길 한 거야."


유시스는 만년필 채로 마키아스의 손을 한번 쥐었다가,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그 때부터 그게 그렇게 기억에 남아서."


아마 그게 처음이었구나 싶었지. 유시스는 그리 중얼대며 조금 그리운 것을 보듯 망가진 만년필을 보았다. 그 시선이 묘하게 따뜻해서 마키아스는 덩달아 조금 따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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