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엔님께 도서관이란 키워드 받아 짧게 썼습니다. 유시마키 아닌 것 같지만 유시마키. 시점은 아마 제도 실습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 듯 합니다. 중요 내용 스포일러는 아마도 없습니다.

섬의 궤적 1 본편을 재탕한 지 좀 오래 되어 시간선이나 세부 설정 등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뎅. 뎅. 교회의 종이 울리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하교할 시간을 알리는 종이기도,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기도 했다.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선 그의 앞을 부산한 발소리들이 계속해서 지나쳤다. 그제껏 남아있던 학생들이 도서관을 나서는 소리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예상 외로 발소리가 많이 들렸다. 과연 토르즈 사관학교. 다들 열심이로군. 저도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사람 중 하나란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마키아스는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대었다. 사서가 안쪽을 돌아보는 소리. 책을 정리하는 소리가 영원처럼 길게 들렸다. 


귓가에 울리는 발소리가 하나하나 바로 옆에 떨어지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와아, 와아아. 마키아스는 천둥을 무서워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움찔대었다. 천둥의 무리가 한바탕 하고 물러간 뒤에야 도서관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후우. 마키아스는 그제야 안도하며 지금껏 숨어있던 캐비닛 속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으로 치면 30분도 채 안 지났을 텐데, 한 몇 시간은 그 안에서 보냈던 것처럼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살던 곳이 살던 곳이니만큼 비행 청소년들이 문 닫은 건물에 숨어들어 운운 하는 사건 소식을 일상적으로 들으며 자라왔지만, 설마 그게 이렇게까지 살 떨리는 짓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윽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에는 덜 빠진 햇빛이 주홍빛으로 고여 있었다. 시계는 이미 해가 지고도 남았을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건만, 여름이라 특히 해가 긴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진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시계와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키아스가 난처해하고 있을 때였다.


"재미있는 곳에서 나오는군. 레그니츠."

"우와아아아악?!!"


등 뒤에서 툭, 던져진 목소리에 마키아스는 저도 모르게 목청껏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텅 빈 도서관에 마키아스의 비명이 한동안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 목청이 꽤 좋았군. 몰랐어."

"유, 유시스 알바레아?!"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유시스 알바레아는-지금 마키아스가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일 소년은 태연한 얼굴로 속 편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네가 굳이 몇 번씩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 정도는 안다."

"누가 좋아서 네 이름 따위 부른 줄 알아? 대체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도서관은 이미 폐장했거든?"

"그거 네게도 그대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만."


…아차. 마키아스는 합 입을 다물었다. 유시스의 담담한 시선이 아팠다. 그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곳에서 나온다 운운 하는 걸 보면 마키아스가 어디에 숨어있다 나왔는지를 전부 본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봐도 수상해 보일 게 뻔했다. 마키아스가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제 3자의 눈으로 보기엔 그나 저나 별다를 것 없이 수상해 보이리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마키아스에게 그럴 정도의 여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그래. 과제! 과제가 있어서 말야! 엄청나게 급해서 자료를 빨리 찾아야 하는-"

"금시초문인데. 그런 과제가 우리 반에 있었나?"

"……자주 과제야!"

"아, 그래."


뭐라고 더 따지고 들지 않는 게 더 근질근질했다. 마키아스는 침묵의 무게를 미처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후우, 유시스는 그제야 폭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빤히 보이는 탐색전은 관두도록 하지. …사서님께 허가를 받았다. 엄청나게 급한 과제가 있는데 찾을 자료가 많아서 도서관을 좀더 오래 쓰고 싶다고."

"뭐, 뭐-"

"그러니 네가 나랑 같이 남아 다소 오래 자료 조사를 하고 있대도 딱히 이상할 건 없을 거다."

"뭐야, 그 적당하기 그지없는 이유는! 나랑 똑같잖아. 그런 게 통할 리가-"

"없겠지, 보통은."

"보통이라니. 너……"

"쓸 수 있는 걸 여러가지 썼을 뿐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아, 그러셔."


대체 무슨 수단을 썼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의욕이 그 말로 확 꺾여 버렸다. 갑자기 전부 다 바보같이 느껴져서, 마키아스는 홱 뒤로 돌아 도서관 안쪽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평소엔 시선도 잘 줄 일이 없는, 귀족 학생들이 공부할 때 자주 쓰는 책상이었다.


끝 책장 옆의 줄, 오른쪽 끝에서 네 번째 자리.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앉기가 황송할 정도로 잘 관리된 주변의 다른 책상들과는 달리 그 책상만 어쩐지 꾀죄죄했으니까. 잘 보니, 다른 책상들과 높이가 조금 다르기까지 했다. 아예 책상 종류 자체가 다른 거라고 한참 더 본 뒤에야 깨달았다. 조금 오래된 모델인 모양이었다. 토르즈 사관학교의 귀족 학생들이 쓸 만한 책상이니 다소 오래되었다 해도 딱히 급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책상만 홀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은 아무래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책상들 사이에 섞여 있음에도. 아니, 오히려 섞여 있기에 그 이질감은 더 크게 느껴졌다.


마키아스는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쓸어보곤 그 자리에 앉았다. 조금 먼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기분 탓이다. 손으로 쓸었을 때엔 먼지 한 톨도 묻어나지 않았으니까. 책상 구석에 괴어 있던 주홍빛도 어느 새인가 말라버리고, 그 자리에 저녁 어스름이 괴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이래서야 과제를 하겠다는 핑계도 안 통할 텐데. 어둠 속에 녹아들어가는 책 위의 글씨들을 보며 마키아스가 탄식하려는 찰나, 옆에서 작게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평민 주제에 귀족님 자리를 쓰는 게 맘에 안 든다 이거야? 책 읽으려면 다른 데 가서-"


옆자리에 하얗게 불이 켜졌다. 책상 어딘가에 작은 도력등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마키아스는 입을 딱 벌리고 제 옆자리에 책을 들고 앉은 유시스를 보았다.


"뭘 착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가 내 자리인 것 뿐이다. 체스로 땄지. -네가 한 것처럼 말야. 레그니츠. …그리고 도력등 스위치는 여기 있다."


유시스의 손이 불쑥 마키아스의 책상 위로 넘어와, 상 구석의 어딘가를 더듬었다. 이내 마키아스의 자리에도-몇 번 지직대긴 했고 밝기도 조금 약한 듯 했지만-도력등이 희게 켜졌다. 책을 읽는 정도라면 가능할 듯한 밝기였다. 책상에 이런 것도 숨겨두고 있단 말이지. 더러운 귀족 놈들. 마키아스가 툴툴대자 유시스는 그럴 줄 알았다. 하고 픽 웃기만 했다.


"이게 있는 걸 알고 한 줄 알았는데. 자리 따기."

"그럴 리가. 그냥 위층에서 자리 내기 한다고 시끄럽길래 그놈의 자리는 대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보자 싶었을 뿐이야."


대수롭잖듯이 날린 코웃음 위를 꼬르륵, 하는 소리가 덮었다. 마키아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확 달아올랐지만, 유시스는 웃지조차 않았다. 그는 혼자만 색이 다른 마키아스의 책상을 빤히 바라보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툭,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를 딸 때 보너스로 쓸데없는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말이지. 귀족 기숙사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하더군."

"뭔진 몰라도 엄청 쓸모없는 소문일 것 같군."

"뭐, 그렇지. 이런 걸 혼자만 알고 있기도 싫으니, 심심풀이 대신해서 네게도 알려줄까 싶은데."


엄청 급한 과제가 있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지만 거기서 필요 없어, 라고 말할 기분도 안 들어 마키아스는 유시스의 말을 끊지도, 듣겠다고 동의를 표하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침묵을 어디까지고 긍정으로 해석했던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건 정말 어디에나 있을 법한 괴담이었다.


토르즈에 귀족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시절이니 꽤 오래 전일 것이다. 여튼 그 오래 전의 언젠가 제 메이드와 사랑에 빠져버린 귀족 자제놈이 있었다고 한다. 나름 비밀스럽게 만난다고 한 모양이지만, 얼마 안 가서 둘의 사이는 만천하에 알려졌고, 메이드는 제가 모시는 주인을 홀려 나쁜 길에 빠지게 한 계집이라 손가락질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일자리를 잃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상대인 귀족 자제놈은-뭐 어느 정도 혼쭐이 나긴 했겠지만, 그 이후에도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고-여튼 아무 일도 없는 듯 잘 살았다고 한다. 기실, 그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사랑하는, 아니 사랑하던 이에게 아무 일도 아니게 된 그 메이드가 현실을 깨닫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다. 그가 늘 공부하던 도서관의 한 자리 위에 목을 맨 여자 시체가 나타났을 때, 자리의 주인은 그녀가 대체 누구인지 한동안 기억해내지도 못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놈팽이가 졸업을 했는지 퇴학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튼 학교를 떠나게 된 뒤에도 그 자리에는 밤만 되면 메이드 복장의 여성이 나타나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을 음울한 표정으로 지켜보곤 한다는-뭐, 그런 이야기였다. 


"체스로 자리 따기라곤 하지만, 결국은 좋은 자리를 선점해서 그 자리를 배정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라고 그러더군. 어차피 자기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할 필요 같은 거 없으니 반쯤 연례 행사 같은 거라고."

"……그래."


마키아스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유시스도-사기를 당했군, 레그니츠. 같은 말 같은 건 덧붙이지 않았다. 꼬르륵, 작은 소리가 재차 빈 도서실에 울렸다. 마키아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책 글씨도 겨우 보일 정도로 희미한 불빛으로는 유시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잘 보이지 않았다. 


"……허락을 받은 시간은 밤 열 시까지인데."

"유령이 나오는 건 보통 자정 즈음 아니었던가?"

"정말 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냐, 너. 저녁도 안 먹고?"

 

무모한 데도 정도가 있지. 유시스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키아스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툴툴대었다. 하긴, 문을 잠그고 가면 아침까지 밀실이 되는 도서관에 폐장 시간에 숨어들겠다는 결심을 하는 시점에서 아마 그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유시스는 문득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살롱의 귀족 학생들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레그니츠가, 평민이 운운 떠들고 있었고, 그게 이상하게 신경쓰여 평소에는 안 할 대국 신청을 자기 쪽에서 걸었더랬다. 그것도 내기 체스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고 속으로 부르짖으면서도 사서에게 연장 이용 신청을 넣었고, 텅빈 도서실 안에서 묘하게 움찔대고 있는 청소용구함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정말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마키아스는 평소보다 한 톤은 더 낮은 목소리로 중얼대었다. 유시스는 그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가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 자리에 앉아, 음울하게 저를 바라볼 메이드 유령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제발 나타나지 말아주기를 간절히 빌었으리라. 혼자서 그렇게 아침이 올 때까지 아무 빛도 없는 도서관에 앉아있을 생각이었겠지.


"……열 시, 주변에 어딘가 연 가게는 있으려나."


꼬르륵. 누가 냈는지 모르게 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키아스가 웅얼대었고, 유시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키르셰라면 열었을지도 모르지. 술도 파는 가게니까."

"너랑 먹어야 하는 건 안 내키지만, 할 수 없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키아스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책을 읽을 생각은 이미 어딘가로 다 사라진 듯, 그는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끄는 편이 나았으려나. 일순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의 마키아스를 어둠 속에 남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유시스는 모르는 척 함께 허공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안 무서우니까."


마키아스가 작게 다짐하듯 중얼댄 말엔 쿡쿡 웃는 소리만이 되돌아왔다. 

안심한 듯한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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