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렇게까지 빛나 보이는가.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탄식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몇 개 안 차려진 파티 테이블의 저편, 분명 오랫동안 알아 왔을 터였던 옛 동창이 행복에 형상을 부여한 듯한 모습으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복장이 화려하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자신을 비롯해 친한 동창들만을 불러 소소히 하는 가든 파티에 걸맞게, 알리사 라인폴트는 꽤 간소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간소하다 하여 허술하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다. 여전히 마키아스는 고급품이나 여성의 의복을 보는 데에는 젬병이었지만, 라인폴트의 차기 회장이 비록 친한 친구들 앞이라 해도 결코 허술하게 보이려 할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자리가 자리다. 유시스가 알리사를 보자마자 첫눈에 '……저 녀석, 정말 들떴던 모양이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약혼식의 주인공이 빛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주인공이 옛 친구들에, 그 사랑이 싹터 익어가는 과정도 전부 봐 왔다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마키아스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따라 허공에 들어올렸다가 한 모금 들이키며 새삼 감회에 잠겼다.


기실 알리사 라인폴트와 린 슈바르처가 생의 남은 시간을 함께해 나가리라는 건 이미 꽤 예전부터 예상

해왔고, 인정해온 일이었다. 린은 이제 '회색의 기사'란 이명에서도, 과거의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그림자에서도 자유로워져, 지금껏 거기에 쏟고 있던 그 자신을 온전히 알리사에게 주었다. 오래도록 기다렸다 하여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마키아스가 보기에 그것은 참으로 바람직하고, 그럴 만한 귀결로 보였다. 즉, 언젠가는 반드시 그리 되리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 하늘의 태양이 지고, 또 아침이 되면 해가 다시 뜰 것임을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했기에, 마키아스는 알리사의 표정에서 일말의 안도감 같은 걸 발견했을 때 아주 조금 놀랐다. 조용히 하늘을 흐르는 성좌가 제 가는 길에 불안감을 안고 있었음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 이러할지. 나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마키아스는 재차 샴페인을 한 입 머금은 뒤, 저편의 테이블에서 린과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소녀 시절을 연상케 하는, 천진한 미소 옆에 새로 맞추었다는 약혼 반지가 영롱히 빛났다.


왼손의 약지, 혼인 반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서약의 증거이자, 어찌 보면 구속. 저리도 행복해 보이니, 사슬조차 아름답게 빛나는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넋놓고 보고 있던 중,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시스가 툭, 말을 던져 왔다.


"갖고 싶나?"


꼭 과자 쳐다보는 어린애한테 하는 듯한 말투였다. 엄청나게 맥락없는 말이었던 탓도 있어, 마키아스는 한동안 유시스 알바레아 이 자식이 대체 뭔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뭐?"

"약혼 반지 말이다. 갖고 싶냐고 물었다."

"—약, 혼?! 아니, 아니. 잠깐."


하마터면 친구의 경사스런 자리에서 언성을 높여 버릴 뻔 했다. 어릴 적에야 남들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쥐고 뜯고 개싸움도 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 먹어서까지 그럴 정도로 경우없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이 녀석에게 덤벼들었다간 사랑 싸움도 적당히 하란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 이해심 있는 친구들 특유의, 뜨뜻미지근한 시선과 함께. …그랬다간 향후 10년은 동창회에 참여할 생각도 못하게 될 것이다. 위험했다. 마키아스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내에 이 모든 잡상을 흘려보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시스 알바레아는, 한때의 악우이자 이제는-대체 어떤 악연이 어떻게 잘못 튀어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마키아스 레그니츠의 오랜 연인이 된 남자는 자신이 무슨 폭탄을 떨어트렸는지도 모르는 듯 뚱한 얼굴로 마키아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너랑 나랑 그, 야, 야야약, 약혼반지라니, 대체."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제국 법엔 동성혼 인정 안 되거든?"

"되게 해주랴?"


농담도 적당히 하라고 비웃으려다 가까스로 멈추었다. 유시스 알바레아라면 진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등골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하하. 그럴 리가. 법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라고 일소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썩어도 4대 귀족가의 당주 대행이다. 마키아스의 머릿속에 새겨진 법률 지식은 유시스가 정말 법을 바꾸고자 했을 때 그걸 막을 근거법률이 딱히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나마 그를 막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건 같은 4대 귀족가의 당주들 정도인데, 그 중 한 명인 로그너 후작가의 당주는 그들의 선배인 안젤리카 로그너였다. 망했어, 이 나라는 망했다고. 상식적으로 안 하리라 생각하고들 있어 막을 방법도 없는 것이겠지만,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마키아스의 얼굴을 보고 유시스는 훗, 하고 웃으며 무서운 가정에 쐐기를 박았다.


"네 생각보다 귀족들은 동성애에 편견이 없거든."


이 빌어처먹을 귀족 중심주의 국가 같으니. 얼른 뒤집어버리든가 해야지. 간만에 새파랗던 학생 시절에 입버릇처럼 읊던 말을 마키아스는 재차 중얼거렸다. 여기서 조금만 잘못 말했다간 제국의 결혼법이 바뀌고 가정이 흔들리고 나라가…흔들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성혼 커플 제 1호로 유시스 알바레아와 자신이 신문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마키아스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헛소리는 그만 하고. 대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너."

"헛소리라니……"


유시스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했지만, 이내 그만두곤, 안 그래도 뚱한 얼굴을 한층 더 찌푸렸다. 얼굴에 주름 생긴다, 이놈아. 기껏 예쁜 얼굴로 태어나 놓고는. 이젠 경사스런 자리보단 어디의 중역 회의에나 더 어울릴 법한 표정이 된 유시스를 보며 마키아스는 속으로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안 그래도 이젠 슬슬 얼굴 주름을 걱정해야 할 나이이건만.


"너, 자기가 조금 전까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전혀 자각 못 하고 있지?"

"엉?"

"웨딩드레스 잡지 보는 귀족 아가씨들 같은 눈으로 알리사의 반지를 보고 있었단 말이다. 하도 뚫어져라 보기에 약혼반지가 갖고 싶은 건가 했더니만."

"—누가!"


겨우겨우 작은 소리로 으르렁대곤, 마키아스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 짧은 새에 꽤 목이 말랐다. 좀 전에 가볍게 넘겼을 터인 샴페인이 입속에 끈적하게 남았다.


"그냥, 다 알고 있고 이어질 게 확실한데도 형식을 갖추고 형태를 갖추면 새삼 달리 보이는 건가 싶었을 뿐이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알리사는 처음 보니까 말야. 잘 됐지. 재차 샴페인의 탄산으로 끈적한 불쾌감을 씻어내려는 듯, 마키아스는 글라스의 내용물이 냉수라도 되는 양 단숨에 들이켰다. 유시스는 옆에서 작게 혀를 찼다. 뭐야. 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제대로 이야기했잖아. 하지만 그가 그 이상 무언가 말해 오는 일은 없었기에, 두 사람은 별 일 없이 그 자리를 넘겼다.


그게 분명 한 달 전쯤의 이야기였다.


"……당했다. 그 자식, 분명 그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마키아스는 제 앞에 놓인 상자를 보며 탄식했다. 검은 벨벳이 깔린, 손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상자다. 색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패물 상자다. 이게 든 소포 상자는 나름 토실토실해서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레아하트에서 상자가 도착했을 때 바로 우편배달부에게 반송해달라고 부탁할 걸.


"이래선 돌려줄 수도 없잖아……"


상자 안에는 흑녹색 돌을 두른 은빛 반지가 하나.

완벽하게 당했다. 마키아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런 건, 그……왼손 약지인가. 역시."


혼자 작게 중얼거려보곤, 마키아스는 바로 다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왼손 약지라니. 유시스 알바레아에게 받은 반지를, 왼쪽 약지에라니. 아니, 반지에 딱히 누가 준 거라고 쓰여 있지는 않으니, 나름 친분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숨겨왔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들통날 일은 없으리라. 요새 들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맞선 제의를 튕겨낼 좋은 방패막이가가 되어 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시 눈에 띌 거란 말이지……"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남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왼손 약지에 나타난 반지는 눈에 띌 터였다. 분명 언젠가는, 누군가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물어보겠지. 그리고 그럴 때 마키아스는 자신이 어디까지 적당히 둘러대며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넌 그렇게 거짓말을 못해서 인간이 정치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악우 겸 연인이 떠올랐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어. 너는 모르겠지만. 마키아스는 폭 한숨을 쉬며 상자에서 반지를 꺼냈다.


"……어라?"


큰 마음 먹고 왼손 약지에 끼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헐렁했다. 매끄러운 안쪽 표면이 별 어려움 없이 손가락 표면을 뱅글 돌았다. 불량품인가? 일순 그렇게 생각했지만, 바레아하트의 장인 거리가 어떤 곳인지 마키아스는 알고 있었기에 그 가설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하물며 의뢰주는 알바레아 공이다. 잘못 만들어진 물건이 마키아스에게까지 전해질 일은 애초에 없겠지. 잔뜩 긴장했던 건 어느 새 꽤 풀려 있었다. 마키아스는 투덜대며 반지를 왼손 약지에서 빼어 다른 손가락에 한번씩 끼워 보았다. 중지, 검지. 그리고.


*****


"그래. 잘 받았다니 다행이군."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볼 리도 없건만, 유시스 알바레아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젊은 나이에 귀족 연합을 이끄는 수장 중 한 사람이 된 이가 지으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든, 소박한 것이었다. 언제쯤 연락이 오려나 기대하던 것을 배신하지 않고, 그의 성실한 연인은 그 주가 가기 전에 전화를 걸어 왔다. 전화기 너머로도 목소리가 약간 들뜬 듯한 게 잘 보였다. 아무래도 선물한 반지는 그의 왼손 엄지에 자리하게 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진짜로 왼손 약지에 맞도록 한 건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호오. 그걸 기대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설마 껴 본 건가?"

『…누가 그딴 짓을 하냐!!』


…이 반응은 끼어 본 게로군. 거기까지 해줄 줄은 기대도 안 했는데, 의외의 수확이었다. 이걸 파고 들어가 조금 더 귀여운 반응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유시스는 쿡쿡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뭐, 어디에 끼든 무슨 상관이겠어. 슬슬 멋 부릴 소품 정도는 하나 갖고 있어도 될 나이고. 조만간 한 번 저녁이나 하지. 잘 어울리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


전화기를 든 손을 옮기며 유시스는 마키아스가 하는, 제도에 새로 생긴 커피하우스의 이름을 메모했다.


"그럼 기대하도록 하지, 레그니츠."


유시스는 펜을 내려놓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무난한 인사가 돌아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참 다행이군.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유시스는 그리 생각하며 집무실의 책상 서랍 하나를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랍 안쪽, 슬쩍 보아선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에 검은 벨벳으로 싸인 상자가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이걸 보여주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유시스는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제도에 보낸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있었다. 광택을 죽인 은빛 금속에, 언뜻 봐서는 검은색으로 보이는 녹흑색의 돌을 두른.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반지. 지금 유시스의 왼손 약지에 빛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그리고 제도에 있는 마키아스의 것과는 사이즈만이 다른.


"뭐, 어디에 끼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유시스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재차 되뇌며 작게 웃었다.

어디에 끼우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본질이 구속이란 점은 결국 변함이 없건만,


"…결국 다른 사이즈로 하나 더 준비한 시점에서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유시스는 상자 뚜껑을 닫고, 그것을 도로 서랍 안쪽에 밀어넣었다. 처음에는 저것이 다시 세상 빛을 보기까진 적어도 10년은 걸리리라고 예상했지만, 어쩌면 그 날은 생각보다 빠를지도 모르겠다 싶어졌다.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왼손 엄지에 낀 반지는 신념과 의지를 나타낸다고 하네요.


개인적으로 살짝 돋는 포인트로 설정한 건 유시스가 어느새 마키아스의 손가락 사이즈를 전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드러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지를 갖고 싶어할 건 누구인가, 확실한 형태로 서로의 사이를 확인받고 싶어할 건 누구인가 꽤 생각했네요. 사실 약혼반지란 거 마키아스에겐 조금 트라우마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살짝 합니다만, 저 나이쯤 되면 극복했으려나요. 


그리고 남자 반지 디자인 모르겠어요(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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