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시하님(@SIHAST)이 리퀘해서 올렸던 쿠로켄 단편입니다.

타입문의 작품 FATE에 나오는 설정을 일부 차용해서 썼습니다. (성배전쟁, 마술사, 데미서번트 등)

예전에 쓰던 티스토리와 후세터에 나누어 썼던 걸 취합했고, 내용 변화는 없습니다.

켄마가 마술사고, 쿠로오는 평범한 인간이자 켄마의 소꿉친구. 켄마가 서번트 소환할 때 말려들어 데미 서번트가 되고 그대로 켄마의 서번트가 되었다는…뭐 그런 설정이었습니다;3





성배전쟁.


소원을 들어준다는 만능의 가마를 둘러싸고, 일곱 명의 마술사가 각자 온갖 시대의 영웅을 소환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


이야기 자체는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왔다. 이 지역에는 성배가 있고, 우리 가문 또한 이 지역의 성배를 노리고 정착한 마술사라고. 언젠가 이 지역의 성배가 차서, 성배전쟁의 때가 오면 우리는 거기에 참가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몇 대를 거치며 전해져오기만 한 이야기는 중요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옛날이야기나 전설에 더 가깝게 들렸다. 애초에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던 아버지조차도 그것을 '일단은 전해주어야 할 옛날이야기'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성배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그 이후로 어떤 마술의 발동도 감지되지 않았던 그것은 휴화산에서 사화산으로 표기를 전환할까 말까 논의 중인 화산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때의 자신에겐 그런 이야기보다 머릿속에 우겨넣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훨씬 많았다.


마술사의 자식으로 산다는 건 지금껏 쌓아온 지식을 전부 체득한 뒤,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피로, 사람으로, 인생으로 이루어진 사슬. 그것이 마술사의 가계였다. 마술을 공부하는 건 딱히 괴롭거나 싫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양이 양이었다. 슬쩍 지나가는 옛날이야기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 때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뒀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켄마는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부서진 잔해 가운데에 서 있는 장신의 청년을 바라보면서.


"…서번트로 소환되어 현계했다. 나의 검은, 어. 당신에게. …나의. 젠장. 이게 뭐지?"


청년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아마 그가 이해조차 하지 못한 듯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켄마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소환된 서번트와 마스터가 계약을 할 떄 외우는 의식의 주문이었다. 켄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손에는 세 개의 령주가 붉게 빛나며, 눈앞의 청년이 자신이 소환한 서번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비명처럼 빽빽 항의를 올려 대는 자신의 감정과는 정 반대로, 마술사로서의 코즈메 켄마가, 그의 모든 이성이 이것은 영령이라고 말해왔다. 인간의 영역을 넘은 영웅 중 하나. 전설에 이름을 남긴 이. 하늘의 자리에 제 의자를 만들 자격을 얻은 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선 안 돼. 울부짖듯이, 차라리 애원하듯이 항의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갔다.

―이것이 영령이구나. 폭풍을 압축한 덩어리같은 마력에 묘하게 납득해버리는 자신이 점점 커져갔다.

코즈메 켄마는 사람의 기척에 민감한 것만큼이나 마력을 감지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데미 서번트라고 하는 거야."


조용히, 아주 천천히. 켄마의 입술에서 그 자신에게도 익숙지 않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거다. 데미 서번트. 조용히, 아주 천천히. 천에 시럽이 스며들듯이 그 낯선 단어가 현실이 되어 스며들어왔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켄마는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어째서. 어째서 지금 이런 데에 온 거야."


원망하는 듯한 어조로 켄마는 말했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흘렸던 적 없는 눈물이 이제 와서 흐를 것만 같았다. 그는 피가 배어나도록 주먹을 꼭 쥐곤, 자신의 집 홀 가운데 서 있는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쿠로. 대체 어째서."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의 모습을 한 영령이 불안한 듯 눈을 깜박였다.

 

*****

 

5일 전. 손등에 멍이 생겼다.


토스를 올리려 들어올렸던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나보다 더 먼저 알아챈 것은 쿠로와 다른 팀원들이었다. 눈에 띌 정도의 출혈이었기에 처음에는 다들 동요했지만, 피를 닦아내고 난 자리에 작은 멍밖에 없었기에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만일을 위해서 오늘은 쉬고 어디 아프거나 하면 바로 병원에 가. 뭐하면 같이 가줄 테니까. 마지막까지 진지한 얼굴을 무너트리지 않고 쿠로는 거듭 내게 당부했다.


4일 전. 손등의 멍이 점점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변해갔다.


눌러보고 문질러보고 손목을 비틀어 봐도 이렇다 할 통증은 없었다. 설마.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옛날 이야기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쿠로에게는 손목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조퇴했다. 함께 가주겠다는 제안을 들었지만, 거절했다. 만약 정말로 병원에 가게 된다고 해도 쿠로에게 거기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마술은 숨기는 것. 은폐하는 것. 그건 상대가 쿠로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런 상대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고교 때까지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위안하고 있었지만, 역시 어설펐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공방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남겨두신 고문서를 뒤져보았다. 양이 생각보다 많아 다 뒤져보았을 때에는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해 따위 영원히 뜨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아침 햇살에 비친 팔목에는 이제 멍이라 부를 수 없을 세 개의 뚜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팔목을 붕대로 감쌌다. 운동부라서 다행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이런 걸 하고 있어도 눈에 띄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3일 전. 학교에 가지 않고 종일 아버지의 고문서를 정리했다.


손목의 문양은 이제 확연히 마력을 띄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의 마력이 보일 정도로 몸에 깃든 건 처음이었기에 가끔 흠칫흠칫 놀라며 손목을 들여다봐야 할 정도였다. 내 몸에 깃든, 내 것이 아닌 마력. 누군가 그걸 감지해내고 당장에라도 달려들지 않을까 싶어 이곳이 코즈메 가의 공방임을 알면서도 때때로 몸이 떨렸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우리 가문의 마술사들은 직접 싸우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특히 더 그랬고.


애초에 마술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것이 일종의 연구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기록한다. 지금은 생기게는 될지 실감이 안 나는 미래의 자식에게 가르칠 지식을 하나 더 만든다. 내게 마술은 그런 것이었다. 실험실의 미생물이나 화학물품을 다루는 것과 비슷했다. 그 대상이 과학에서 신비로 옮겨갔을 뿐이지. 그걸 가지고 싸우라니,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게 '당신이 이 게임을 만들었으니 게임의 등장인물처럼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겠죠' 라 하며 기관단총이랑 나이프를 들려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요 며칠 간 있었던 일들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단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

아. 나는 이제 죽겠구나.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성배전쟁. 마술사는 물론이고 온갖 시대의 영웅들을 상대하며 서로 죽여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 아무리 생각해도 적성에 안 맞았다. 죽어도 다시 시작해서 적의 패턴을 알아낼 수 있는 게임이나, 본질적으로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는 현대 스포츠와는 다르다.내게는 거기서 살아남을 자신도, 의지도, 수단도 없었다. 한 번 죽으먼 거기서 인생 오버인 게임이라니, 대체 무슨 귀축 난이도야. 피식 웃음마저 나왔다.


어째서인지,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앞으로 학교는 어쩔까. 부 활동은 어떻게 하지. 쿠로는 어쩌지 같은, 쓸데없기 그지없는 생각만이 뭉글뭉글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로, 서바이벌 게임에는 안 맞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손으로 달아오른 눈두덩을 누른 채 짧게 실소했다.


쿠로는 어쩌지, 라니. 대체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어차피 쿠로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혹은 조금 더 가서 내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그의 인생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을 텐데. 몇 년만 지나면 '켄마? 그런 소꿉친구가 있었지. 요새는 잘 지내려나~' 하면서도 끝끝내 연락은 안 할 정도의 존재로 전락할 텐데. 어쩌면 휴대전화에 남은 내 번호로 무난한 메일 정도는 보내볼 지도 모르겠지만, 몇 번 답이 없으면 금방 포기할 정도의 존재밖에는 안 될 텐데. 그게 조금 빨라지는 것 뿐인데.


서바이벌 영화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녀석은 제일 빨리 죽던가. 나는 한참을 공방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을 보았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살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형제라도 하나 더 남겼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도 결국은 나와 본질은 비슷한 사람이어서, 안심할 만한 후계자가 생기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조용히 숨을 거둬버렸다. 나름 오래도록 이어진 마술사 가문을 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도 그걸로 점심 나팔꽃처럼 사그라들었다.

나는 또 밤새 성배전쟁에 대한 자료 정리를 했다.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편이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어 편리했다.


2일 전. 월요일.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이틀 만에 가는 학교는 놀라울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봄 대회는 결국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기에, 팀은 기묘한 정체 상태에 싸여 있었다.


신체제를 갖추려면 우리가 빨리 나가는 편이 나았을 테지만 말이지. 언젠가 쿠로가 코트를 들여다보며,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때는 왜 일부러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미련이고, 죄책감이고 동시에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용서해주었으면 하는 응석이었다.


그 쿠로도 오늘은 학교에 오지 않았던 듯, 체육관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팀원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양심이 아파오는데, 쿠로의 얼굴을 보면 무슨 짓을 해버릴지 몰랐다.

그 날은 짧은 해가 다 질 때까지 학교에 붙어있었다.


집에 와보니 문틈에 작은 종이쪼가리가 끼어있었다. 근처에 있는 오래된 교회의 이름이 적힌 종이였다. 그것이 보통 집이었다면 종교 전도를 위한 광고지려니 하고 넘겨버릴 법도 했지만,이곳은 썩어도 마술사의 집이다. 허가하지 않은 이가 무언가를 남기고 갈 생각 따위는 감히 들지 않을 곳.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것을 응시했다. 미약하게지만 무언가가 느껴졌다. 뇌리 한구석에 어제 보았던 고문서의 일부가 떠올랐다. 성배전쟁의 감독역. 마술사와는 상관없는 제 3의 세력. 나는 폭 한숨을 쉬곤 종이를 문틈에서 빼내었다. 이건 역시 평범한 종이가 아닌, 일종의 사역마겠지. 공방을 침범할 의도는 없다고 세련되게 알려오는. …바보 같아. 전화나 휴대폰 메일 같은 거면 충분하잖아. 마술사답지 않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나는 미약한 마력을 뿜고 있는 종이에 대고 말했다.


“……난 안 도망쳐. 서번트는 아직 소환하지 않았지만. 일단 성배 탐구는 우리 가문의 비원이기도 하니까.”


그 말이 끝나자 종이는 천천히 손 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종이 자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건가. 재미있는 장치였지만, 지금은 그 원리를 탐구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에도 할 일이 많았다.


1일 전. 학교에 자퇴서를 내었다.


담임교사가 혼비백산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으려 했지만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아니, 열 수 없었다. 지금부터 확실히 죽게 될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어 이대로라면 제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말려들게 될 테니 그렇게 되기 전에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말하면 바로 정신병원에 끌려갈 테니 오히려 학교를 그만두기는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아주 잠시 했다.


“―무슨 소리야.”


쿠로가 우리 반에 쳐들어온 것은 반 아이들이 갑자기 나왔다는 자퇴생이 누구일지에 대해 수근대고 있을 때였다. …예상은 했지만 오는 게 지나치게 빠르잖아. 나는 혀를 찼다. 우리 반 교실 앞에 귀신 같은 형상으로 서 있는 쿠로는 교복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눈에 띄는 장신인데다 전 배구부 주장인 쿠로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끈다. 반 아이들이 술렁대며 나와 쿠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반에 배구부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제 발로 그 앞에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내 손목을 낚아채 교정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저 첫 마디. “무슨 소리냐고 물었잖아. 켄마.”


“……우리 반 애들도 모르는 일인데 소식이 지나치게 빠르지 않아?”

“네 담임이 전화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냐고.”


그런 거, 내가 더 알고 싶다고! 쿠로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함부로 헝클며 거칠게 내뱉었다. 2월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쿠로의 온 몸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집에서부터 뛰어온 걸지도 모른다. …미안한 짓을 했다. 기껏 자유등교기간이라 푹 쉬고 있었을 텐데. 처음으로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편이 나았을까 하는 후회가 마음을 간지럽혔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떨어내었다.


내가 만일 그냥 사라지거나 연락을 끊어버린다면 적어도 쿠로나 팀원들은 분명 나를 찾으려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성배전쟁의 도중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한 전투에서 일반인인 그들을 지킬 여력은, 냉정히 말해 제로에 가까웠다. 최악의 경우 인질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역시 돌아올 곳도 돌아올 가능성도 철저히 부수는 것이리라.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쿠로가 들은 대로야. 학교, 그만둘 거야. 아버지의 옛 지인이 부르셔서, 그쪽으로 건너가게 됐어.”

“거짓말.”


쿠로는 무서울 정도로 눈을 번뜩이며 내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이런 어설픈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잖아. 나는 저도 모르게 욱해서 그 눈을 마주 노려보았다.


“거짓말 아니야.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아니, 거짓말이야. 너처럼 환경 바뀌는 거에 민감한 녀석이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고 바로 거기로 건너가? 웃기지도 않아.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싸한 걸 찾아. 적어도 반년은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빌어먹을. 쿠로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쿠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면 네가 무슨 자신감으로 나를 그렇게 잘 파악한 척 하느냐며 비웃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쿠로는 달랐다. 그와 내가 함께해온 시간이 그의 뒤를 단단히 받쳐주고 있었다. 진작에 끊었어야 할 것을. 진작에 뿌리쳤어야 했을 것을.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술은 숨기는 것. 은폐하는 것. 인간의 삶을 벗어나 진리를 따르는 것. 말로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내게는 각오가 부족했다. 앞으로 몇 년 같은 유예 따위는 처음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이런 건, 사람으로서 소중한 것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에 선 장신의 소꿉친구가 지금껏 내가 쌓아둔 채 외면하던 태만과 미련의 덩어리처럼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에 거짓말이래도, 그게 쿠로랑 무슨 상관인데?”


짜증 섞인 말투로 내뱉자, 쿠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입이 열리려는 것을 또다른 말로 막았다. 지금 쿠로가 말하게 둬서는 안 되었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끌려가 버린다.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소꿉친구니까, 팀원이니까 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그만 둬. 애초에 쿠로가 졸업하는 시점에서 그런 건 소용없어지는 거잖아. 설마 대학에까지 가서 소꿉친구를 챙길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쿠로도 집에서 나가잖아. 어차피 조금 있으면 상관없어질 인생이었어.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고.”


가능하다면 할 수 있는 한 최악의 말을. 쿠로가 완전히 질려버려서 그런 녀석 따위 이젠 모른다고 돌아보지도 않을 법한 말을.

쿠로가 나를 안다면 나도 쿠로를 알 터였다. 평생까지도 필요 없었다. 단 며칠. 적어도 일주일.쿠로가 내 머리가 식을 때까진 돌아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면 족했다.


“애초에, 질린다고.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나가서 맞지도 않는 스포츠 따위 시키는 거. 어릴 적 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쯤 되면 그것도 슬슬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들어? 슬슬 어른이 되지 그래? 설마 사람들이랑 못 어울리는 소꿉친구를 내가 도와주고 있다는 우월감에라도 빠져 있어? 구역질 나. 그쪽은 멋대로 자기만족에 빠져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울리는 나는 엄청나게 피곤하다고. 하기도 싫은 거에 억지로 맞추고 있던 내 생각도 좀 해보지 그래?”


허억, 허억. 오랜만에 말을 끊지도 않고 단숨에 한 탓인지 숨이 차올랐다. 스펠을 읊는 것과는 역시 요령이 다른 걸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쿠로가 주먹을 꾹 쥐는 것을 바라보았다.얻어맞게 될까. 하고 남 일처럼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소꿉친구라고는 해도 쿠로는 자신이 한 살 위임을 자각하고 있어서인지 내게 손을 올리는 일은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말다툼을 하다가 세게 밀치는 정도로는 몸싸움을 했던 것 같지만, 학교에 들어가게 되며 그나마도 거의 없어졌다. …소중히 여겨지고 있었던 거라고도, 대등하게 여기지 않는 거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쿠로는 다정하니까 백이면 백 전자였겠지만.


차라리 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중히 여기고 있던 친구에게 하루아침에 배신당했다. 마음 한구석, 은밀하게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말로 후벼 파였다. 상처받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때리면 좋을 텐데. 상처받았다고, 그걸 조금이라도 너도 알아보라고 폭력으로 호소하면 좋을 텐데.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쿠로의 주먹이 내질러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래.”


쿠로는 나직히 그 한 마디만 하고는 뒤로 돌아 가 버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끝까지 쿠로가 그 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주먹이 희게 변할 정도로 꾹 쥐어졌다가, 끝까지 풀리지도, 무언가에 내질러지지도 않았다는 것 외에는 알 방도가 없었다. 쿠로의 발걸음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가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한번에 몰아쉬었다. 이걸로 되었다.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잘못했다.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도, 전부 잊게 할 수도 없다니. 마술이 무엇이고 진리가 다 뭐람.


짐을 전부 챙겨 돌아오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쿠로가 무어라 말이라도 했던지 그 이상 누군가가 교실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무슨 맛이 나는지 알 수 없는 저녁을 우물대고, 공방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영령을 소환하는 수단은 그 영령과 인연이 있는 촉매.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나는 그저 성배가 추천하는 대로 영령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이른바, 운이다. …최근에 돌렸던 유료 가차에선 뭐가 나왔더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결과였던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붉은 염료를 녹여 만든 마법진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채워라.

반복할 때마다 다섯 번. 그저 채워지는 순간을 깨트린다』


평소의 우물거리는 발음과는 달리, 똑바로 발음한다. 스펠은 수학 공식 같은 거니까. 거기에 넣는 기호 하나라도 틀리면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답이 나와 버리고 만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스펠을 외우며, 나는 공방 구석에 세워져 있던 시계에 눈을 주었다.


―자정까지 10초, 9초, 8초.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나에게. 나의 운명은 그대의 검에.

성배의 인도에 따라 이 뜻. 이 이치에 따른다면 답하라.

맹세를 여기에.

나는 온 세상 모든 선을 이루는 자. 나는 온 세상 모든 악을 베푸는 자.

그대 삼대 언령을 두른 일곱 하늘.』


무서울 정도로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10초도 안 되는 남은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나는 한계까지 숨을 참은 뒤,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외쳤다.


『억지의 윤회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주문을 마치는 순간, 공방―저택의 한 구석이 빠끔히 열렸다.

자정. 운명이 바뀌는 날.


Ryurel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