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 스토리 스포일러有. 신주쿠 서번트 진명有.


이번 여름 이벤트의 신주쿠 어새신을 보고 이건 써야겠다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주쿠 스토리와 서번트 진명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보지 않으시길 추천합니다. 

'주인님'이 자신을 정의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신주쿠 어새신과, 관계 맺기가 조금은 두려울지도 모르는 구다코 이야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주쿠 아처랑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의 경우는 지나치게 변수가 많아서 말이지. 나라 해도 섣불리 뭐라 말할 수는 없겠군."


노신사는 주어진 문제를 가볍게 내던져 버렸다. 우아하게 지팡이를 만지작대면서였다. 젠장, 도망쳤겠다. 소녀는 추욱 어깨를 늘어트렸다. 노골적인 실망의 표시에 노신사는 쓰게 웃었다. 여차저차해도, 그는 제 마스터인 소녀에게 약했다. 한때의 특이점에서는 '사랑하는 자'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사람인 것이다. 특이점에서의 그와 소환된 뒤의 그가 다른 사람이고, 그 기억이 공유되지 않는다 해도 취향이란 건 어디 가지 않는다.


"파파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좀 지나치게 실망하는 것 같은데, 마이 걸."

"대디가 좀 대단한 사람이어야지. …아니, 영령인가? 여튼. 옛 직장 동료 같은 거니까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단 말야. 설마 노코멘트일 줄은."

"직장 동료라……"


설마 그렇게 뭉뚱그려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노신사는 한동안 벙 쪄 있더니 이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뭐야, 맞잖아. 직장 동료. 비록 세계멸망 같은 거 꾸미는 직장이긴 했지만. 소녀는 여전히 뾰로통해져서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노신사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원래는 할 생각이 없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역시 무르다. 한때는 세계멸망까지 꾸몄던 악의 보스로서 괜찮은 걸까. 이런 건. 일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임스 모리어티는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부업이자 취미로 전 유럽에 범죄를 컨설팅하는 악의 조직을 만들어볼 정도로는.


뭐, 사랑에 빠져 몰락하는 악의 보스라거나, 딸을 익애하는 딸바보 파파 같은 것도 나름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버리는 건 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픽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빌런일 터인 악의 보스는, 목하 익애 놀이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


"뭔가 보고 싶은 거 있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흥얼대던 노랫가락 사이에 그런 말이 섞여서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소녀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시 멍하니 있다, 겨우 그것이 노래가 아닌 말임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저를 향한. 그나마도 지금껏 몇 번쯤 들어본 말이었기에 겨우 알아들은 것이었고. 엷게 의식을 덮고 있던 선잠이 일순간에 걷혔다.


"여자친구 영화 취향 모르는 연애 초보같은 말이네. 그거."

"……그 예시 묘하게 구체적인데. 그나저나, 그거 경험담이야?"

"레이디의 사생활은 캐는 게 아니야. 협객 씨."

"협객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하인이기도 하니까. 주인님을 파악해두는 건 하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잖아?"


면박을 주었건만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청년은 말했다. …아니, 그런 당연 모릅니다. 하인의 세계에선 저런 게 당연했단 말입니까. 뭐야. 고금동서의 모든 주인님들 사생활 보호라는 말 알고 있어? 괜찮아? 온갖 말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소녀는 뭐라고도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다양한 시대의 온갖 영령을 대해 오며 그녀가 익힌 지혜 중 하나였다. 내가 모르는 건 당연한 일. 그들의 상식과 내 상식이 다른 건 당연한 일. 함부로 논하지 말 것. 평가하지 말 것.


소녀는 은밀하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 1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름 저와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지금 제 머리맡에 앉아있는 청년은 그 중 어디에도 맞아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모시는 자신을 사랑하고, 거기에 만족하며 주인을 파악하고, 그 주인을 제게 새기려 한다. 온몸에 독살스러울 만큼 선명히 새긴 모란과 용 문신이 그러하듯이. 그 등에 새긴 '의(義)'자가 그러하듯이. 협객이라 하니 으레 의협의 한 글자이겠거니 생각했던 게 옛 주인의 이름 중 한 글자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 망할 자식. 뭐가 '한때 주인이 있었는데 말야……뭐, 그것뿐이야.' 냐.


그의 '주인'을 모시는 자세는 신을 모시는 성직자와도, 왕을 모시는 기사와도 달랐다. 적어도 그들은…그, 이렇게까지 주인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충성을 다해 모실게요, 마스터.' 뒤에 '뭐, 너는 내 왕이 아니지만!' 하는 말이 붙긴 했지만. 사실 동급으로 대한대도 곤란했기에, 너는 내 왕이 아니란 말은 동시에 그와 같은 급이 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말로도 들려 가끔은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도 그런 부류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청년을 복잡한 심경으로 응시했다. 늘 끼고 있는 수갑(手甲)은 벗고 있었다. 크고, 따뜻하고, 약간은 단단한 손이다. 머리카락에 손가락이 걸리지 않도록 빗어 내려가는 손길이 부드러워 깜박 정신을 놓았다간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감상을 입에 담으면 그는 '그야, 그게 목적이니까.' 하고 만족스레 웃으리라.


요새 들어 쉬이 잠들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는 시간만 되면 이불을 가지고 방에 쳐들어와, 문답무용으로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잠들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주곤 했다. 처음에는 '애도 아니고 그런 걸로 잠이 들겠냐!!' 하고 내심 반발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딴 걸로 왔다. 잠이. 톡톡, 이불 위에서 가만히 두드려주는 손길과 나직한 흥얼거림, 그리고 아마 그 몸에 배어있는 듯한 향 냄새가 어느 새인지 소녀를 훅, 잠의 계곡 아래로 밀어 떨어트려버리곤 했다. 분하게도, 이제는 슬슬 이게 수면의 트리거 비슷하게 각인되어 버렸는지, 가끔은 혼자서 불을 끄고 자 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결국은 자는 척하며 버티다 청년의 노랫소리에 겨우 진짜로 잠들었더랬다. 자장가가 없으면 못 자는 어린애도 아니고, 젠장. 분한 마음도 제 옆에서 진심으로 기쁜 듯 노래를 흥얼대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슥 누그러들곤 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소녀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도중 때때로, 그는 갑작스레 생각난 듯이 소녀에게 물어오곤 했다. '뭔가 보고 싶은 건 없냐.'고. 딱히 별일도 아닌 듯, 하지만 평온히 흐르던 콧노래를 굳이 한번 뚝 끊어 놓고서는.


이게 다른 점이었다. 전 주인과의 흔적을 그렇게 보이도록 온 몸에 새겨놓고서는. 애정도 증오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기반으로 '자신'을 만들어놓고서도—그는 계속해서 소녀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뭐가 보고 싶은가.


어떤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가.

내 주인이 원하는 내 모습은 무엇인가—하고.


'딱히.' 소녀는 언제나처럼 대답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면 된다고 생각해.' 그러면 청년은 고운 눈썹을 밑으로 떨구며 '그게 제일 곤란한 대답인데.' 라고 답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언젠가 질문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청년 나름의 낙제 판정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수많은 영웅들에게 마스터라 불리며 존중받고 때로는 사랑마저 받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류사의 위기라는 이상 사태 때문이었다. 영령들은 협력자이자 파트너였지, 결코 그녀가 어쩔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받아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반대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 그대로 옛 이야기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자장가에 익숙해져, 언젠가는 사라질 그의 목소리가 없으면 제대로 잠들기도 힘들어진 지금의 자신처럼. 그는 언젠가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말 터이건만.


불공평해. 소녀는 입술을 비죽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게 있더군.』


소녀의 머릿속에 오늘 낮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시대의 물리학에 도입된 불확정성의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비유인 모양이다만―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물리학이니 뭐니 하는 말에 기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소녀를 보며 노신사는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학자는 말하지. 상자 속의 고양이는 관찰자가 관찰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태도 될 수 있기에, 어떤 상태도 아닌 것이라고. 어떤 상태가 될 확률만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라고.』


그렇다면 말일세, 마이 걸. 하고 노신사는 장난스레 윙크했다.


『고양이를 정의하는 것은 고양이를 '그렇게 만드는' 자―즉 관찰자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궤변이네. 관찰자는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아무 것도 안 하지는 않았지. 상자를 열었잖나.』

『상자를 열었을 뿐이지. 고양이의 생사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걸.』


꽤 유명한 관용구라 대강 그게 뭔지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들어보니 악취미적인 비유다. 소녀는 자신이 상자를 연 것 때문에 고양이가 죽어버렸을 경우를 생각하며 바르르 떨었다. 노신사는 껄껄 웃었다. 어이쿠, 이런. 비유가 나빴던 모양이군. 하면서.


『나는 말일세, 마이 걸. 그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그'를 생각했다네.』

『무슨 소리야?』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 그야말로 본래의 자아가 희미해질 정도로 완벽하게. 그건 즉, 무엇이든 될 확률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소리일세. 다시 말하면―』

『기다려. 그 이상은 말하지 마.』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두려워 소녀는 노신사의 말을 막았다. 환령, 떨어진 거 아니었냐고. 노신사를 째려보며 그리 묻자, 노신사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겨 보였다.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즉시 나타나는 흰 관짝을 보며 소녀는 이를 갈았다. 그러고 보면 로보도 목 없는 용병과 함께 칼데아에 왔더랬다. 소녀는 재차 노신사를 째려보았다. 신주쿠에서 적대했던 노신사와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노신사는 소녀의 적대감 어린 시선에 흑흑 소리 내어 우는 척을 했다. 일단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거꾸로 왜 그에게서만 환령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지가 궁금한데.』

『하지만, 그. 연청은―』

『제정신처럼 보였으니까?』


소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도플갱어의 능력으로 변신하면, 그 사람의 기억이 남아버린다. 청년은, 연청은―사라지기 직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 기억이 전부 남아버려, 결국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하지만 칼데아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는 자신을 '낭자 연청'이라고 말했다. 신주쿠에서 보였던, 인격 자체가 위태위태한 듯한 모습은 그 파편도 보이지 않았다.


인정하자. 방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하려고 했는데.』


분한 듯 주먹을 꼭 쥐어보이는 소녀를 보며, 노신사는 딱하다는 듯 조금 전 끊었던 말을 이었다.


『신주쿠의 그와 지금의 그는 같은 사람일세. 아, 뭐. 다른 사람이지만. 이 쪽 설명은 복잡하군. 여튼, 환령은 여전히 붙은 채야.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그 때와 다르지. 그렇다면 다른 이유 또한 있지 않겠는가.』

『이유……?』

『그래, 이유.』


이해가 느린 학생을 가르치듯, 노신사는 천천히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교수라고 했지. 그러고 보면. 소녀는 뇌리 한구석에 좋아하던 탐정 소설의 일부분을 떠올렸다.


『뭐, 단순한 이야기라네. 그는 협객이자, 변장의 귀재이자, 동시에 충실한 하인이지. 그것도 주인에게 엄청나게 미련이 있는.』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주인이 있지. 노신사는 하얀 관을 도로 사라지게 만들며 지루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상자 속에 든 가여운 고양이와는 다르게, 그의 경우는 죽거나 살거나의 양자택일은 아니니 말일세. 음, 굳이 따지자면―자네가 레이시프트를 할 때 칼데아 측에서 하는 존재 관측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신주쿠에선 왜 그렇게 된 거야.』

『에? 그야 당연하지. 나, 그의 주인님이 아니었는걸.』


50줄의 중후한 노신사가 갑자기 귀여운 말투를 쓰는 데에도 꽤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소녀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노신사는 쳇. 하고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대체 무슨 반응을 기대했단 말인가.


『그도 아마 바라지 않았을 거고. 지배하려고 한 순간 아마 내 머리가 날아갔을걸? 내기해도 좋네.』

『……』

『뭐, 당신의 색으로 물들고 싶어요☆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까지야.』


회상은 거기서 끝났다. 제길, 더 가기 전에 그만뒀어야 하는데. 50줄의 중후한 미노년 신사가 당신의 색으로 물들고 싶어요☆ 하고 가성을 써서 말하는 장면 같은 건 아무리 취향의 폭이 넓다 해도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정신적 충격을 고려해주면 좋겠다. 나오기 1초쯤 전에 소리 주의 같은 코멘트라도 달아주든지.


"……마스터?"

"??!"


단정한 얼굴이 바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누운 자리에서 한 뼘쯤 뛰어오를 뻔하곤, 소녀는 큼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미,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생각이라."


화들짝 놀라는 소녀의 모습에 덩달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청년은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장난스런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신주쿠에서 날 납치했을 때 이런 식으로 웃었지, 이 남자.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안 죽이겠다고 말하면서였던가. 새삼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살기는 못 느꼈던 것 같다. 그의 인격이 불안정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서, '뭘 보고 싶은지'는 정했어?"


드물게도 재차 물어오는 모습에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주 가끔, 다른 영령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 이 사람들에게 나는 한 권의 책 정도로만 기억되겠지 하고 쓸쓸해졌던 게 기억났다. 나는 그들을 만나 이렇게 변하고, 이 기억은,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내게서 떼어내지도 못할 만큼 깊이 섞일 텐데.


"……그야 나도 한 번쯤은 상대가 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음?"


갑자기 소녀가 중얼거린 말에 연청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혼잣말. 소녀는 담요로 입가를 덮으며 우물대었다.


상대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상대를 내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 뭐, 결국은 일상적으로 해오는 커뮤니케이션 중 하나기는 했지만, 그 상대가 말 그대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이면 또 그 무게감이 달라진다. 게다가 이렇게 나를 정의해달라고 요구해 오는 상대라면 더더욱.


소녀는 입가를 덮고 있던 담요를 슬쩍 내렸다. 연녹색의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마귀 깃털 같은 흑발도, 단정한 이목구비도, 커다랗고 조금 단단한 손과 거기서 은은하게 풍기는 이름 모를 향 냄새도.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었다. 나중에 아파질 걸 알면서도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제 속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만큼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각하지 못했던 예전부터 줄곧.


어쩌면 그에게도, 이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소녀는 상자를 열기로 결심했다.


"그냥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흐음. 뭔가 길게 생각하기에 다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걸. 내가 말한 대로 원하는 대로 홱홱 바뀌어버린다는 거, 솔직히 조금은 무섭고."


다만, 하고 소녀는 덧붙였다.


"노래, 콧노래로만 하지 말고 가사도 들려줬으면 좋겠어."

"헤?"

"연청의 노랫소리가 좋으니까. 콧노래는 크게 해봤자 한계가 있잖아?"

"마스터는 못 알아듣는 말일 텐데."

"고대 수메르 어도 문제없이 알아들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뭐, 못 알아듣는대도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그러니까 조금 더 아프기로 결심했어. 소녀는 제 머리 옆에 대어진 커다란 손에 살짝 볼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곤란한 사람이로군. 내 주인은."


청년은 고운 눈썹을 내리깔며 웃었다.


"하여간 내 주인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욕심이 많아서 곤란해."


청년은 잠시 주저하는 듯 하다가, 가만히 입을 열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제껏 콧노래로만 부르던 곡조가 처음으로 가사를 얻었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였다.


"내일은 다른 노래를 불러 주지."


재주 좋게도, 노래는 딱 소녀가 반쯤 잠에 취했을 때 끝난 듯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노래. 아는 건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노래는 좋아하거든. 춤도, 술도.


"좋은 술을 알고 있거든. 언젠가는 같이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고양이는 처음으로 제 소원을 입에 담았다.

소녀는 설핏 웃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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