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미라클 구미 1회에 냈던 프렌유리 책의 첫번째 단편입니다. 이후 단편도 천천히 올릴게요.

뒷편은 18금이지만 이 부분은 전연령이므로 전연령 공개합니다.

일부 비문과 표현 수정이 있지만 내용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냈던 책이라 지금 보니까 조금 부끄럽네요…





“자, 유리. 이거.”


프렌이 생글생글 웃으며 유리에게 내민 것은 붉은 사과였다. 정확히는 붉게 물들인 종이를 솜씨 좋게 오리고 이어 붙여 만든 가짜 사과였지만, 붉게 빛나는 표면은 아랫마을의 노점 등에서 볼 수 있는 시들시들한 진짜 사과보다 훨씬 더 사과답게 보였다. 자. 어서. 어서 받아 들라고 재촉하기라도 하듯 프렌은 그 종이 사과를 유리에게 내밀었으나, 유리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뚱했다.


“이게 뭔데?”

“뭐라니. 사과야. 사실은 진짜를 주고 싶었지만 요새는 어디를 가도 먹을 걸 구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지나가는 유랑 악단이 극의 소품으로 쓰던 걸 부탁해서 하나 얻어 왔어.”


그러고 보니. 붉은 색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었지만, 종이 사과의 한 귀퉁이에는 누군가가 입을 대기라도 했던지 새빨간 입술 연지가 묻어 있었다. 한 점 주저도 없이 되돌아온 프렌의 대답에 유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건 보면 알아. 내 말은 이걸 왜 나한테 가져왔느냔 거야.”
“그야 이제 곧 수확제니까……”


또다. 유리는 더 이어지려 하는 프렌의 말을 짜증 섞인 한숨으로 끊어버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저 뒤에는 수확제 때에는 그 해에 난 농산물을 함께 나누며 수확을 축하하는 법이란 말이 이어지리라. 유리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싫을 정도로 잘 예상할 수 있었다.


프렌 시포. 어느 시점부터 그와 유리의 인생이 겹치게 되었는지를 유리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옆에 있었고, 어느 새인가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유리는 이제 먹을 것을 찾을 때 프렌의 몫까지 함께 챙기고 있는 자신이 어색하지 않았다.


프렌은 아무리 보아도 아랫마을의 들개 새끼들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기보담 저 거대한 성 안에서 예쁜 옷을 입은 채 행복하게 웃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어울릴 듯한 아이였다. 그것은 유리 외의 다른 사람들이 봐도 그러했던지 그가 맨 처음 이 아랫마을에 흘러들었을 때 아랫마을의 주당들은 그가 며칠도 못 가 이런 곳에선 못 살겠다 울어 젖히리라고, 그리고 그 후로 며칠도 못 가 어딘가의 골목 한 구석에서 죽어 나자빠지리라고 키들대며 내기를 걸었더랬다. 그 수는 두 손으로 다 못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랫마을에 흘러 든 지 얼마 안 되어 프렌은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아랫마을의 들개 새끼로 탈바꿈함으로써 그 모든 비웃음 섞인 기대를 배신했다. 나아가 그런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는 법도 없었다. 그런 면에 끌린 것일 지도 모른다고 유리는 가끔 저 자신에게 변명하듯 되뇌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미덕들을 옆에 늘어놓고 보아도 마음에 안 드는 점은 마음에 안 드는 법. 이미 망치고 말고의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재해 수준까지 들어선 요리 실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해도 목구멍 안에 든 잔가시처럼 유리의 속에 껄끄러이 걸리는 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런 점이었다.


아마 이 곳에 흘러들기 전까지는 행복하고 따스한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프렌은 무언가 기념할 일만 있다 하면 빠짐없이 무언가를 주워 들고 와 유리에게 건네곤 했다. 이런 날엔 이렇게 하는 거래. 하고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생글생글 웃으며 유리에게 내미는 선물들은 아랫마을의 들개 새끼가 준비할 수 있을 법한, 즉 쓰레기와 잡동사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법한 물건들뿐이었다. 그러나 프렌이 선물을 건네고 그 날을 함께 축하하는 일 자체를 빼먹은 적은 유리가 기억하기론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별 걸 다 챙기는 녀석이다 싶었다. 프렌과는 다르게 유리는 부모와 함께 지낸 기억은커녕 부모의 얼굴마저도 기억에 없었다. 누군가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주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게다가 그 대상이 자신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프렌의 그런 행위는 유리에게 있어 그저 약간의 기행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뭐, 까놓고 말해 공짜로 무언가를 받아서 손해 볼 건 없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 준비해준다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까. 피해가 오지도 않는데 프렌이 약간 묘한 짓을 한다 하여 무에 상관할 바가 있을까.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처음에는.


유리? 제 이름을 부르는 프렌의 목소리에 유리의 의식은 현실로 급히 끌려 올라왔다. 깊은 잠에서 갑자기 깬 이가 꿈의 수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대듯이 유리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슬 둘러보았다. 프렌이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과 함께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프렌에게 '괜찮아.' 라고 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의 손에 아직도 꼭 들려 있는 종이 사과가 유리의 눈에 들어왔다. 입 안이 급격히 까끌까끌하게 말라오는 느낌이 들어, 유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프렌에게 해 주려던 대답도 그와 함께 목 뒤로 넘어가 버린 듯,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유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처음에 하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나 나갔다 올게.”
“아직 시간이 좀 이르지 않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먹을 것 부스러기라도 구할 수 있을 것 아냐…그런 먹지도 못할 것 말고.”


마지막 말을 뱉은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미안. 말이 헛 나왔어. 바로 뒤돌아 그리 말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을. 하지만 유리는 차마 거기서 뒤돌아 프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갔다 올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프렌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확제가 다가오고 있다 해도 아직 한낮의 거리는 더웠다. 축제를 맞아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는 열기와 초가을 한낮의 햇볕이 어우러져 유리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재잘대며 떠드는 사람들과 거리에 뿌려진 색종이 조각들과, 머리에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유리는 일부러 짙게 그림자 진 포석들만을 골라 밟으며 거리를 헤매었다. 상한 음식을 먹어 토한 후와 같이 찝찝한 감각이 입 안에서 떠나질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했을 뿐인데 어째서.


“……제길.”


짐짓 욕설을 뱉어 보아도 입 안의 이물감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결국 그 날 밤이 될 때까지 거리를 떠돌았음에도 유리는 빵 덩어리 하나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한 채 빈 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프렌? 여기엔 안 왔어. 먼저 돌아가 있는 거 아냐?”
“아, 그거 있을 법 하네.”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섞였다. 아하하. 유리도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메말라 있을 것임을 유리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축제의 열기에 취한 사람들은 유리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그럼 나중에 봐. 쾌활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유리는 오늘 밤 들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자식, 어딜 간 거야……”


이미 노을의 주홍빛 따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하늘에는 등불 빛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수확제의 밤을 알리는 등불이었다. 저 위의 시민 거리와 귀족 거리의 불빛에는 밝기도 화려함도 한참 미치지 못할 빛이었지만, 변변한 조명 마도기조차 없어 해가 지면 슬럼으로 변해 버리곤 하는 아랫마을의 밤 풍경을 생각하면 오늘의 거리는 신기할 정도로 화려했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웃음소리. 평소의 저녁 식사 시간에는 죽어도 나지 않을, 기름기 있는 것을 굽는 냄새. 아랫마을은 전에 없이 들떠 있었다. 즐길 만한 여유 따위 하나도 없는, 이름뿐인 축제라 해도 그저 그것만으로도 모두들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그 들떠 있는 아랫마을의 풍경 안에 프렌만이 없었다. 원래 기념할 만한 축제 등은 빠지지 않고 기억하며 챙기는 녀석이니 거리 어딘가에서 자질구레한 기념품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그렇게 넘겨버리려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한 시간, 두 시간. 프렌이 돌아올 법한 시간이 조금씩 지나며 유리의 여유도 점점 말라 갔다. 축제의 떠들썩함에 잠시 가려져 있다고는 해도 밤의 아랫마을이 어린애 혼자 돌아다니기 위험한 슬럼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자식, 찾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줄 테다. 결국 혀를 차며 유리는 아지트를 나섰다.


처음에는 그냥 그 근처의 거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유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아랫마을은 물론이고 시민 거리 근처를 샅샅이 뒤져도 프렌의 모습은커녕 그를 보았다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리는 건물의 벽에 쓰러지듯 등을 기댔다. 계속해서 돌아다니느라 생각보다 체력을 소모했던 모양이다. 벽에 닿은 부분으로부터 나른한 피로감이 온 몸을 엄습해왔다.


“……돌아갈까.”


이렇게 찾아보았는데도 없다면, 먼저 아지트에 돌아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단순히 서로 길이 엇갈렸던 걸지도 모르지. 몇 시간 동안 바쁘게 제도의 절반을 뛰어다닌 것치고는 상당히 바보 같은 결말이지만, 저 같은 고아에게 인생이 사정 좋게 돌아가 주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땀에 촉촉하게 젖은 피부에 초가을 저녁의 바람이 차게 느껴질 때 즈음이 되어 유리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었다. 그 때였다.


“유리? 거기 유리지?”


누군가가 밝게 유리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프렌이 자신을 마중 나온 것인가 했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실루엣은 아무리 봐도 프렌의 것이 아니었다. 머리도 길었고―무엇보다도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작게 한숨을 쉬고 있노라니 유리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소녀의 실루엣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유리에게 다가왔다. 다갈색 머리에 큼직한 주근깨가 박힌 하얀 얼굴. 분명 시민 거리에서 꽃을 파는 티나였다.


“역시 유리였구나.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이런 데에 다 있고.”
“티나냐. 너야말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여자애가 이런 데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유리의 말에 소녀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그거, 유리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얼굴만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예쁜 주제에 사내라고 내 걱정 해 주는 거니? 고마워라.”
“여기서 왜 얼굴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그야 유리는 아랫마을 모든 여자애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공공의 적이니까.”


켁. 유리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팩 돌렸고 티나는 다시 깔깔 웃었다. 꽃을 따 파느라 풀물이 들고 거친 손가락이 유리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몇 번 쓰다듬었다. 그 손가락에서 풍기는 들풀 향에 유리는 팽 돌아간 고개를 다시 제자리에 돌렸다. 힐끗 들여다 본 티나의 꽃바구니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장사가 잘 됐나 보네.”
“응. 수확제 당일인걸. 전날까지 화관 만드느라 잠도 못 자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지. 아, 유리한테도 한 송이 줄까?”
“내가 꽃을 받아서 어디에 쓰게. 뒀다가 내일 팔기나 해.”
“낭만을 모르는구나, 요 꼬맹이! 이 누나가 주는 수확제 선물이니까 입 다물고 잠자코 받기나 하렴. 어차피 꽃은 내일이면 다 시들어 버려서 팔 게 못 되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디 보자. 역시 수확제니 하니카위 꽃이려나? 아, 하지만 이건 프렌에게 받을 테니까 다른 걸로……”
“프렌이라고?”


방금 전까지 애타게 찾아 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에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리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랐는지 티나 또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 응. 오늘 해질녘쯤인가에 하니카위 꽃을 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어보길래 가르쳐줬더니 거기로 뛰어가던데? 유리에게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니?”
“꽃밭……”


맹점이었다. 마을 안을 뒤져서 찾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개를 갸웃대던 티나가 다시 꽃바구니를 뒤지기 시작하려던 찰나, 유리가 득달같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꽃밭, 어디에 있어?”
“자, 잠깐. 유리?!”
“어디냐니까?”
“아, 아랫마을 쪽 성문 근처에…결계 끝 부분…하지만 지금 이 시간이면……”
“고마워. 티나!!”


유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뒷말은 듣지 않고 냅다 달음박질쳤다. 마음이 급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리도 제도 토박이였기에 슬슬 밤이 되어가는 이 시간에 결계의 경계선 부분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프렌이 아직까지 거기에 있다고 한다면 더더욱 자신이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똑똑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맹한 녀석이라면 시간에 상관없이 꽃을 찾아 결계 끝이 아니라 결계 바깥으로도 나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겨우 다 식었던 호흡이 금세 달아오르고 종아리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지만, 유리는 이를 악물며 제 몸을 채찍질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면서도 유리는 지금 거기에 프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찾는 이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도 필사적으로 달리는 자신이 우스워서였을까. 어느 새 유리는 달뜬 숨 새로 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험……이었던가, 그래, 보험. 삼아서야, 제길.”


없는 걸 확인하면 되는 거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웃으면서 아지트로 돌아가면 되는 거다. 불을 켜는 순간 손에 풀물을 잔뜩 물들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프렌을 발견하고, 대체 무슨 걱정을 사서 한 거냐며 자신을 비웃어주면 되는 거라고. 유리는 몇 번이고 자신에게 중얼대었다. 계속해서 되뇌면 그것이 진실이 될 것이라 믿기라도 하듯이.


그랬기에 겨우 도착한 꽃밭에서 프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유리가 느낀 것은 예상이 빗나갔다는 당황이 아니라 아아, 역시나. 하는 체념이었다.


“어라, 유리?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유리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프렌의 손에는 샛노란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 티나의 꽃바구니에 있던 것들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서투른 화관이었지만, 그조차도 초보자인 프렌에게는 힘겨웠던지 주변에는 형편없이 꼬인 꽃줄기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마도 금방 화관을 만들어 돌아올 생각이었던 것이 계속 실패하다 보니 의외로 오래 걸리게 된 것이리라. 방금 전까지 힘껏 달린 후 미처 못 뱉어낸 숨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달구고 있었건만, 유리의 머리는 이상하게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 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밤임에도, 프렌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그 꽃들은 달빛을 받아 작은 달인 양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유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화관 아래에 숨겨진 프렌의 손이 풀물에 새까맣게 물들어있는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챈 듯, 순간 콱 하고 숨이 막혀왔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프렌을 바라보고만 있노라니 프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리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여전히 어설픈 화관을 든 채였다.


“유리. 왜 그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긴 시간 꽃밭에 있었던 탓일까, 가까이 다가온 프렌에게선 달큰한 흙냄새와 들풀의 풋풋한 향이 섞여 물씬 풍겼다. 달빛에 향기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향이리라. 그 향이 프렌에게 잘 어울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유리의 목 안에는 싸하게 이름 모를 아픔이 더해 갔다. 지나치게 힘을 준 어금니가 몇 번이고 싫은 감각과 함께 미끄러진 다음에야 유리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거.” 턱짓으로 프렌의 손에 들린 화관을 가리키며 유리는 힘겹게 말했다. “그거 만드느라 늦은 거야?”

“어? 아, 응. 미안. 티나가 만든 게 훨씬 더 예쁘긴 하지만, 아무래도 비싸서. 꽃은 내가 찾으면 공짜니까 화관만 직접 만들면 되겠지 했는데…아무래도 잘 안 되더라고. 계속 다시 만들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수줍게 웃으며 프렌은 달빛을 받아 은처럼 빛나는 화관을 조심스레 유리의 머리에 씌웠다.


“늦었지만, 즐거운 수확제 되기를, 유리.”


행여나 꽃잎이 흩날릴 세라 프렌은 조심조심 화관을 유리의 머리 위에 올렸다. 프렌의 손끝이 머리카락과 뺨을 스치는 감각에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꽃과, 프렌의 머리카락과, 옅게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와, 그리고.


“-둬.”

“응?”
“그만 둬, 이런 거.”
“유리?”


안 그래도 동그라니 커다란 눈을 한층 더 동그랗게 뜨며 프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동작이 유리의 안에 가득 차 넘실거리던 수면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이런 거 그만 두란 말야. 즐거운 수확제라고? 웃기지 마!! 네가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고 거기에선 어떻게 그 즐거운 명절인지 뭔지를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네가 살던 곳이 아니야! 그 곳과 이곳은 다르다고!! 나는-"


나는, 뭐? 나오는 대로 쏟아내던 중 턱 하고 걸리는 한 마디에 유리는 멈칫했다. 머리 위에 걸린 화관과 종이 사과. 풀물이 든 프렌의 손과 행복한 듯 웃는 표정. 프렌에게서 행복한 웃음 어린 작은 선물을 받을 때마다 가슴 한 가운데에 턱 하고 걸리던 무언가.


아아, 그렇구나. 유리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프렌이 수줍은 듯 웃으며 건네주던 선물은 하나같이 ‘행복’이라는 이름의, 유리가 모르는 기원을 담고 있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아랫마을의 더러운 고아였던 그에게, 동화 속의 행복을 슬쩍 엿보는 것조차 애저녁에 건너뛰었던 그에게 그것은 마치 종이로 잘 만든 가짜 사과와 같은 것이었다. 아름다운 겉모양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코를 대어 냄새 맡으면 향기조차도 풍길 것 같지만, 입에 대어 음미하려는 순간 암울한 현실만을 허물처럼 남기고 망가져 버리는 질 나쁜 환상.


그랬기에 프렌의 소원이 두려웠다. 행복해지기를. 그 소원은 어떻게 해도 이뤄질 수도, 이루어 줄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언젠가는 자신의 소원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깨달은 프렌이 그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 소원을 이루어줄 수 없는 친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언젠가는 프렌이 자신을 떠나 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나는…그런 거, 너에게 줄 수 없는데. 그런 거.”


행복이라니, 그런 것-나 자신조차도 어찌 하면 얻을 수 있을 지 알 수 없건만.


웃음이 나왔다. 이런 순간조차도 눈물만은 나오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로 유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억눌린 웃음소리는 차라리 우는 것이 덜 추하리라 싶을 만큼 잔뜩 비틀려 있으리라. 프렌의 눈이 경악으로 인해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시원하기조차 했다. 프렌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무슨 뜻인지 이해조차 못 하는 행복을 이해하는 척 하던 것도. 너 혼자서는 이 아랫마을에서 반나절도 못 버티고 죽어 나자빠질 테니까, 하고 되도 않은 인생의 선배인 척 하던 것도. 사실은 조금 즐거웠지만―이걸로 전부 끝인 것이다.


“……먼저 갈게. 나 오늘은 다른 데서 잘 테니까 알아서 들어가.”


프렌의 경악한 표정을 더 보는 것도 괴로웠다. 유리는 팩 돌아섰다. 수확제의 열기가 덜 꺼진 지금이라면 밤을 지낼 만한 곳은 썩어 넘치도록 많겠지. 빌어먹을 축제의 열기가 이럴 때엔 도움이 되다니 얄궂은 일이라 생각하며 유리가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기다려……!”


아플 정도로 강하게 손목을 잡아오는 손길에 유리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프렌이 유리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차라리 마물이 공격해왔다 해도 이리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뭐야.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아, 혹시 이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자신이 생각해도 추한 비아냥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프렌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유리의 말에 한 순간 울 듯이 얼굴을 찌푸리는가 했지만, 프렌은 이내 유리의 나머지 한 쪽 팔도 잡아 그 몸을 완전히 자신 쪽으로 돌려놓았다. 저 말라빠진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유리가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런 것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프렌이 말했다.


“고개 돌리지 마, 유리. 똑바로 내 눈 봐.”
“……”


조용하고 나직했지만 프렌의 말에는 반항은 물론 비아냥조차 용서치 않는 강한 힘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프렌은 유리의 양 손목을 꼭 붙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진지한 눈으로 유리를 한참 쏘아보는가 싶더니 프렌이 꺼낸 첫 마디는 의외의 것이었다.


“미안해.”
“뭐?”
“유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오해라니, 뭐가.”
“전부 다-라고 하고 싶지만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유리가 나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


흠칫 놀라 눈을 돌리려 하는 유리의 손을 프렌은 놓치지 않고 꾹 붙잡았다. 잡고 있는 손에 약간 더 힘을 준다는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유리는 시선조차 돌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건 대체 뭐 하는 마법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유리는 프렌을, 정확히는 자신을 바라보는 프렌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유리가 말한 대로야.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건 간에 지금의 나는 아랫마을의 고아야. 어떻게 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어. 하지만 유리.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거짓말.”


즉시 나온 반박에 프렌의 푸른 눈이 슬픈 듯 흐려졌다.


“거짓말이 아니야. 물론 힘들긴 하지만, 그것과 행복은 별개인 걸. 유리랑 만나서 행복하고,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해. 그러니까 힘든 생활이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유리는 내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는 유리가 내 곁에서 건강하게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받고 있어."
"……"
"그도 그럴 게, 유리가 없었으면 나 같은 건 아랫마을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을 게 뻔한걸.”


양 손목을 아플 정도로 붙잡고 있던 손에 어느 새 힘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도 못 가 이런 데서 못 살겠다고 울어 젖힐 거라는 데에 5갈드. 며칠도 못 가 죽어 나자빠질 거라는 데 10갈드.”


유리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프렌이 처음으로 이 아랫마을에 흘러들었을 즈음, 술집의 주당들이 차가운 경멸과 자조를 담아 걸곤 하던 내기의 내용이었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라고 묻는 대신 프렌은 조용히 웃었다. 슬픈 듯은 했지만, 거기엔 제 목숨을 가지고 그런 내기를 걸었던 자들에 대한 미움도 분노도 없었다.


“그 내기에서 내 편을 들어준 건 유리뿐이었어. 내기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내 옆에 함께 있어 주었지."
"―너, 그걸 어떻게."


유리의 경악한 표정을 보면서도 프렌은 작게 웃을 뿐이었다.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한 생활에 유리는 먹을 것이 모자란 날엔 부족한 먹을 것이나마 반으로 나누어 내게 주었고, 이 아랫마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이곳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


거기까지 말하고는 숨이 찼는지, 프렌은 아주 작게 숨을 고쳐 쉬었다. 그럴 법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 긴 말이 아니었지만, 프렌의 목소리에는 하나하나 지그시 눌러 밟듯 은근한 힘이 담겨 있었으니까.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에겐 유리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래서였어. 프렌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쩐지 꿈꾸는 듯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유리와 만난 이후의 시간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했으니까. 그 시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주자고 생각했어.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부분에 책갈피를 끼워 넣거나 메모를 하듯이. 그럼 나중엔 그걸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그 때를 떠올릴 수 있잖아? 그러니까 작게나마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념하고 그걸 소중히 여기자고 생각했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유리도 그렇게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겨 주기를. 이후에도 내가 주었던 선물들을 보고 아, 이 때엔 이랬구나. 라고 함께 행복해져 주기를 바랐어. 행복이란 건 돈이나 먹을 것과는 다르게 함께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거니까. 하지만……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였구나.”


스륵, 그제껏 유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프렌의 손이 서서히 풀렸다. 프렌은 풀물이 옮은 손을 감추기라도 하듯 등 뒤로 감추었다.


“유리가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 미안. 정말로 미안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한 주제에 프렌은 있는 힘껏 웃음 짓고 있었다. 프렌의 손에서 옮은 체온이 초가을 밤의 바람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유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시작은 분명 이리도 환하게 웃는 아이가 시덥잖은 내기에, 구설수에 올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한 번 주운 걸 내버리는 것은 뒷맛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또 그 뒤로는, 한 번 가르치고 나면 곧잘 저 하는 대로 잘 따라 하는 동갑의 소년이 쓸모 있어 뵈기도 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바람 한 번 스치울 때마다 식어가는 체온 마냥, 프렌이 열심히 이야기하는 ‘행복’이란 단어는 숨 한번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그 윤곽이 흐려질 만큼 멀고도 멀었다.


하지만. 유리는 다시 한 번 어금니가 삐걱댈 만큼 이를 꾹 악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말할 차례였다.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


프렌의 목 안에서 큭, 하고 물기 어린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런 말 하는 건 성격에 안 맞는데. 차마 프렌처럼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할 자신은 없었기에 유리는 눈마저 꾹 감았다.


“하지만 네가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좋아. 행복한 명절 되기를, 하면서 웃어주는 게, 날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주는 게. 내가 그걸 받는 것만으로도 세상 다 가진 듯한 얼굴을 하는 너를 보는 건 즐거웠어. 네가 나한테 예전의 가족과 생활을 겹쳐 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고 껄끄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온 몸의 심지가 따스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의 한 구석이 따끔하게 아픈 것만 같은 감각을 유리는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가슴을 빼족하게 찔러 오는 불안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되, 그것과 미묘하게 섞여 오히려 더 저를 안타깝게 만들었던 또다른 무언가의 이름을 지금껏 유리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게 네가 말하는 행복이라면……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쓴 것을 삼키듯 겨우겨우 마지막 말까지 마친 순간 유리를 덮친 것은 달큰한 흙내와 풋풋한 풀내음이 섞인 향과, 울음 섞인 체온이었다.


달이 향기를 풍긴다면 이런 향이리라 생각했던 냄새.
-아아, 프렌의 냄새다.


꾹 감았던 눈을 뜨는 것이 아까워 유리는 천천히 손을 뻗어 프렌의 등만을 쓸었다.





Present for you
-After Story




“유리. 짐은 다 챙긴 건가요?”


에스텔의 목소리에 유리는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어? 아…응. 이것만 넣으면 돼.”


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에스텔이 보지 않게 하려고 재빨리 가방 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아.”


다음 순간 바사삭,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그 형체를 잃어버린 그것을 유리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리? 방금 무슨…어머나.”


유리의 어깨 너머로 짐가방을 들여다보던 에스텔이 그 광경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리의 손과 짐가방 안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드물게도 동요하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던 걸까. 하지만 그녀는 이내 호기심의 시선을 거두곤, 짐가방 안에 조각조각 부서져 있는 그것의 잔해를 어찌어찌 주워 모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유리가 재차 정신을 차린 것도 딱 그 즈음이었다.


“미안. 쓸데없는 일을 시켜 버려서.”
“괜찮아요. 그나저나 망가져 버려서 어쩌죠?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면 중요한 물건이었을 것 같은데.”
“……별로.”
“유리, 묘한 공백을 느낍니다만?”
“시끄러운 공주님이구만.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유리는 버릇 나쁜 고양이를 가르치듯 소녀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에스텔은 한동안 토라져 볼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이내 마음을 풀고 다시 유리의 짐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짐 정리라고 해도 긴 여행을 마친 지 얼마 안 된 터라 남아 있던 물건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 크지 않은 짐 가방이 꽉 차는 것과 동시에 그 짐 정리는 전부 끝났다. 원래 물건이 별로 없는 방이었기에 짐 정리가 끝났다 해도 딱히 달라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나머지는 테이블 위에 남은, 말라빠진 화관의 잔해뿐이었다. 저것만 치워 버리면 끝인가-중얼거리면서도 유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에스텔이 한참 그 옆모습을 바라보아도 유리는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했다.


“아깝게 되었네요. 예쁜 화관인데.”
“그래? 내 눈엔 말라빠진 데다 어설픈 화관으로 밖엔 안 보이는데.”
“유리도 참. 또 그렇게 짓궂은 말을 하고…아, 그래요!”


에스텔은 무언가 생각난 듯 방에서 뛰쳐나가더니 잠시 후 작은 액자를 가지고 왔다.


“이 액자에 그 화관을 보관하는 건 어떨까요? 종이에 잘 붙여 그 위에 유리를 덮는다면 감쪽같을 거예요! 분명 다시 망가질 일도 없을 거고요.”
“액자라니, 저런 거에 딱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그럼, 버려 버릴까요?”


액자를 보란 듯 두 손에 든 채 생글생글 웃는 에스텔을 보며 유리는 미간을 눌렀다. 저 녀석, 요새 들어 쥬디와 자주 다니더니 어째 이상한 것만 배우고 있지 않아?


“……조각 맞추기를 좀 도와 줬으면 좋겠는데.”
“네!”


소녀는 활짝 피는 꽃처럼 웃었다.


“그나저나 유리가 하니카위 꽃 화관을 가지고 있다니 놀랐어요.”
“하니카위……? 그러고 보니 그런 꽃이라고 들어본 것 같기도 하네.”


화관 조각에 접착제를 바르던 에스텔이 그 말에 놀란 듯 유리를 바라보았다.


“설마 모르고 계셨던 건가요? 상당히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길래 전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전혀 몰라. 예전에 수확제 날 밤에 받은 거라서.”
“수확제 날 밤의 하니카위 화관!”


제 손에 접착제 묻힌 화관 조각이 들려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손뼉을 쳐 버릴 뻔 하고선 에스텔은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

다. 급히 그 조각을 제 자리에 붙인 후, 그녀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상기된 뺨을 양 손으로 감쌌다.


“정말이지 멋져요! 저, 수확제 날 밤의 하니카위 화관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이 꽃 보통 수확제 때쯤 되면 서로 주고받고 바닥에 뿌리고 하지 않던가?”
“한 송이 한 송이는 그렇지만 화관은 특별한 겁니다! 정말이지, 유리는 전혀 모르고 있군요! 이래서야 유리에게 화관을 준 사람이 불쌍해지지 않나요?”


코로 브레스라도 내뿜을 것 같은 기세로 유리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에스텔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동안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기세였다. 유리는 두 손을 들어 항복을 외쳤다.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하지만 정말 모르겠으니까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공주님.”


저한테 미안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미안해야죠.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에스텔은 조용히 매무새를 고쳐 앉았다. 동화나 옛날이야기를 해 줄 때의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음유시인이 하프에 선율을 실어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에스텔은 찬찬히 이야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떤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님과 꽃 파는 청년이 살았습니다.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주님의 아버지, 즉 그 나라의 왕이 온 나라에 포고문을 내렸습니다.


“내 딸의 혼기가 찼으니 그 신랑감을 찾아야겠다. 수확제 밤의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공주의 아름다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품을 선사하여 내 딸에 대한 그대들의 마음을 보이도록 해라.”


온 나라의 돈 많은 남자들이 공주를 위한 화려한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온 나라의 보석이란 보석이 씨가 마르고, 온 나라의 세공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습니다.
가난한 꽃 파는 청년에게는 그런 보석을 살 돈도, 세공사를 고용할 돈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그런 장식품을 만들 재주는 더더욱 없었지요. 청년은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며 정성껏 꽃을 키울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수확제 날이 다가왔습니다.


왕의 궁전에는 공주를 위한 장식품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 모든 장식품들을 몸에 걸치면서도 공주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고, 왕의 표정 또한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확제 날은 점점 저물어 가고, 수확제 밤의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궁성 바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꽃 파는 청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에는 노란 하니카위 꽃으로 만든 화관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하루 눈물로 키웠던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엮어 만든 화관이었습니다.


“이런 초라한 장식품이 공주님께 어울릴 리가 없어. 그녀를 모욕할 셈이냐!”


공주님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사람들의 노성이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청년은 아랑곳 않고 똑바로 공주님께 다가갔습니다.


“제게는 보석을 살 돈도 없으며, 금은을 다룰 재주 또한 없습니다. 제 가진 것은 당신에 대한 마음과 당신을 생각하며 피운 꽃뿐이니 그들을 엮어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청년이 건넨 화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그 순간,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작은 꽃들이 공주님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위에서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보석과 금은 장식보다도 그 작은 화관이 공주님에게 가장 잘 어울려 보였으니까요.
어쩌면 그 화관을 쓴 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었기 때문일 지도, 어쩌면 청년의 사랑에 감동한 보름달이 잠시의 기적을 내려준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맺어져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야기를 끝낸 후 작게 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에스텔은 방긋 웃었다. 아시겠나요? 라고 묻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수확제 밤의 만월 아래에서 주고받는 하니카위 화관은 특별한 거예요. 유리에게 그 화관을 준 사람도 분명 유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것을 주고 싶었던 게 틀림없어요.”


정말이지 부러워요-하고 양 뺨을 붉히며 허공을 바라보는 에스텔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유리는 다음 화관의 조각에 접착제를 발랐다. 요 화관이 프러포즈랑 비슷한 의미를 지닐 정도로 특별한 거란 말이지? 프렌이? 나한테? 잠시 생각해 보다가 유리는 픽 웃었다.


프렌도 몰랐던 거겠지. 분명히. 아직 어린애고 하니 그냥 예뻐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걸 주고 싶어 했던 게 틀림없으리라.


“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맞는 것 같지만 말야.”


제 가진 것은 당신을 향한 마음과 당신을 생각하며 피운 꽃뿐이니 그것을 엮어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에스텔의 이야기에 등장하던 꽃 파는 청년의 한 마디를 중얼거리며 유리는 조심스레 화관 조각을 종이에 붙였다.


오늘 떠나기 전에 프렌의 얼굴이라도 보러 잠시 들르도록 할까. 노란 꽃과 맛난 사과라도 한 아름 사서 가져가는 거다. 창문으로 들어가기 조금 힘들어지긴 하겠지만, 뭐 가끔은 괜찮겠지.


어쩐지 즐거워져 유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가을 치고는 아직 무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거리에는 수확제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활기차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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