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하님의 CoC 자작 시나리오 '단영'을 야마구치 타다시로 테스트 플레이한 뒤의 후일담 소설입니다.

일단 시나리오 내용 스포일러는 넣지 않았습니다…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츠키시마를 짝사랑하던 야마구치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억제하는 걸 좀 덜 하게 되었음'

'야마구치가 츠키시마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으며, 츠키시마는 이를 기억하지 못함'

'츠키시마는 도쿄, 야마구치는 미야기의 대학에 진학했음.'

정도의 사전 정보만 알아두시면 보는 데에는 문제 없습니다. ...아마도.


좋은 시나리오를 써 주시고, 테스트 플레이와 2차 소설 작성 허가해주신 시하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션 진행 중에는 야마구치가 츠키시마를 짝사랑하고 있는 걸 츠키시마가 아는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NPC 츠키시마를 롤 플레잉 하는 마스터의 재량에 맡겨, 저도 지금껏 모르고 있습니다.

멋대로 상상해 써 보았네요.




츠키시마 케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라고 말하면, 본인도 아니면서 무슨 아는 척. 이라는 딴지가 걸려올지도 모르겠네. 야마구치 타다시는 내심 쓰게 웃으면서도, 재차 소꿉친구의 고운 얼굴을 힐긋 들여다보았으며―확신했다. 

역시, 츠키시마 케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만일 이 자리에 두 사람 외의 다른 이가 함께 있어, 야마구치의 속내를 들었다면 바로 '아니, 대체 어딜 봐서?!' 라고 태클을 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에겐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어느 한 점을 가만히 응시하는 미인에게서 당황이란 감정을 읽어낼 만한 스킬 따위 없다. 츠키시마 케이가 다른 이들에게 성격 까다로운 놈이란 소릴 듣는 이유였다. '이렇게 솔직하고 귀여운데 말이지.' 야마구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꿉친구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새삼 곱씹어 보았다.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안대도 어찌 할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야마구치. 이거 뭐야."


빙긋빙긋 웃으며 저를 바라볼 뿐인 소꿉친구에게서 먼저 답이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고 판단한 거겠지. 츠키시마는 껄끄럽다는 듯 물어 왔다.


"뭐냐니. 신칸센 티켓. 미야기 행."

"그런 건 보면 알아. 그런데 왜 두 장인 거야?!"


넌 분신술이라도 쓸 셈인 거냐. 버럭 소리지르려다 츠키시마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예를 들면 고등학생 때―이라면 그냥 질러버렸겠지만, 대학에 들어와 따로 떨어진 이후, 아무래도 야마구치와 거리감을 재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은 늘 내일 죽을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만날 때마다 '아, 이거 잘못하면 다시는 못 만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단 것에 가깝지만.


아니, 뭐. 도쿄와 미야기가 옆동네도 아니고, 멀리 떨어져 살게 된 동성 친구가 자연스레 소원해지는 건 뭐 그리 드문 이야기도 아니긴 하다. 애도 아니고, 고향을 떠난 시점에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있었지만―츠키시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만날 때마다 이젠 다시 못 볼 사람을 보듯 애틋해지는 야마구치의 모습은 여하튼 사람 기분을 묘하게 만들곤 했다. 대체 이 초조감을 뭐라 부르면 좋담. 그때마다 츠키시마는 네 앞에 있는 나는 어디 안 가니 제발 그 시한부 환자 같은 태도 좀 어떻게 하라고 야마구치의 멱살을 잡을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지를 망상하곤 했다. 그랬다간 이 시한부 환자가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실행에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랬는데.


"그야 츳키도 갈 거니까."


눈앞에서 너무도 당당히 굉장한 말을 하는 이 사람은, 과연 내가 알던 그 야마구치가 맞는 걸까.

츠키시마 케이는 최근 들어 다시 없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


"……나 추석에도 귀성 안 했는데."

"응. 알아. 아키테루 군, 엄청 풀 죽어 있었으니까."

"……"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다. 적어도 자신에겐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귀성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메신저로 연락했을 때엔, 가족 모두가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라고 복사해서 붙이기라도 한 듯한 대답을 보내왔을 뿐이다. 그거, 설마 나만 몰랐을 뿐이고 가족들 나름의 시위 같은 것이었을까……아니, 그 전에.


"대체 왜 네가 우리 형의 속마음을 해설하고 있는 거야……"

"그야, 집 가까운걸. 그 사람, 츳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꼭 날 불러낸단 말야. 그럴 정도면 직접 연락하면 될 텐데."


덕분에 주량만 늘었어. 하고 야마구치는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데운 술을 엽차처럼 들이키면서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감상이 뇌리를 스쳤지만, 츠키시마는 그 중 하나도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술 마시는 야마구치를 보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그야, 술 마실 나이가 된 이후 자주 못 만난 탓도 있긴 했지만. 아마 그 뿐만은 아니었겠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제 홈 그라운드로 돌아와서였을까, 얼굴빛 하나 안 바꾸고 술을 들이키는 오랜 친구는 도쿄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니, 편안하다기보단. 굳이 말하자면.


"……뻔뻔해졌다?"


야마구치가 술을 뿜어냈다.


"더럽잖아. 뭐 하는 거야."

"콜록, 케흑! 츳키가. 이상한, 말. 하니까……!!"


야마구치는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알콜에 사레들리면 물보다 더 괴로운 걸까. 야마구치는 한동안 얼굴조차 못 들고 괴로워했다. 아주 조금 죄악감이 들어, 츠키시마는 티슈 곽에서 티슈를 몇 장 대강 뽑아내어 야마구치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지. 자, 얼굴 닦아. 혹시 물 필요해?"


어색한 손으로 등을 쓸자, 그 와중에 마른 등이 화들짝 뛰었다. 불에라도 덴 듯한 반응이었다. 도마 위에 오른 생선 같군. 일순 그런, 조금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눈물에 젖은, 살짝 빨간 눈이 홱 이쪽을 보았다. 그 동공이 아주 잠시지만 바짝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낯선 것을 경계하는 야생짐승같은 눈. 나는 언제부터 그에게 이렇게까지 경계당할 만한 존재였던가. 츠키시마가 놀라기도, 상처받기도 전에 야마구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그 몸에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꽃 몽우리가 움트듯, 천천히. 어찌보면 괴로워 보일 정도로 힘겹게. 


양지에 내던진 눈덩이가 녹아가듯이, 성에 같이 희게 피었던 경계선이 촉촉하게 녹아들어갔다. 이내 평소의―글쎄. 이젠 무엇을 평소로 칭할 수 있을지 츠키시마로선 알 수 없었지만―야마구치 타다시가 되돌아왔다. 그동안 계속해서 들여다보단 친구의 눈에서 츠키시마는 무언가가 목졸려 죽을 뻔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놓여나 도로 숨을 틔우는 모양을 본 것만 같았다. 


츠키시마 케이는 확신했다. 야마구치 타다시는 확실히 변했다. 변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어떤 방향으로일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재미없어, 츠키시마는 입술을 비죽였다.


"술 맛있냐?"

"어? 어, 음. 나는 좋아하지만. 츳키가 좋아할 맛일지는, 글쎄."

"마셔보면 알겠네. 나도 줘."

"에? 에에? 잠깐. 츳키??"


 갑자기 그렇게 마시면―하고 황급히 말리는 야마구치를 뿌리치고, 츠키시마는 오렌지 주스를 담아 마시던 제 잔에 조금 전까지 야마구치가 마시던 술을 한껏 따라 마셨다.


"츳키. 잠깐. 그거 소주―"


망할 형 같으니.

확, 하고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츠키시마는 내심 야마구치의 주량을 늘게 해버렸다던 원흉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퍼마시게 하면 소주를 엽차처럼 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게 되는 거냐고. 

아, 하지만 그 사람이 야마구치를 부른 건 결국 나 때문이었던가.

그럼 나 때문인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츠키시마 케이의 의식은 여기서 끊겼다.


*****


터널을 벗어나면 그곳은 설국이고, 공원이고, 소꿉친구의 방이었다.

츠키시마 케이의 꿈이 멈췄다.


'최근에 이렇게 백일몽을 꿨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허공에 붕 뜬 듯 머리가 멍했다. 츠키시마는 멍하니 방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얗게 켜져 있던 형광등은 꺼지고, 노란색 취침등이 켜져 있었다. 눈이 덜 아파 좋았다. 무심결에 눈가를 더듬어보니 안경이 벗겨져 있었다. 완전히 잘 분위기. ……이 안 닦았는데.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이를 닦을까 일순 생각했지만, 누운 채로도 어지러워 도무지 일어날 수 없었다. 몇 초만에 양치질을 포기하고, 츠키시마는 도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자니 여하튼 머리가 어지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언젠가 도로 잠이 들려니. 마음을 애써 편히 먹고 불그스름한 어둠 속에서 태아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천이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귓가를 긁었다. 초가을 것 치곤 꽤 도톰한 담요가 츠키시마의 몸 위에 덮였다. 섬유유연제 향이 옅게 풍겼다. 긴 시간 함께 운동부로 활동하며 이제는 자신의 집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친구네 집 섬유유연제의 냄새였다. 자취를 시작했음에도 변함없는 냄새에 어째선지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다시 한번 부스럭 하는 소리와 함께 불그스름한 어둠 위에 한층 더 그림자가 졌다. 막 씻고 오기라도 한 듯, 야마구치의 몸에선 훅 하고 습기찬 온기가 느껴졌다.


"츳키. 아직 자?"


상냥한 목소리에선 취기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눈을 뜨기도 뭐해, 츠키시마는 그냥 계속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나지막하게 낮춘 목소리는 취기의 요람에 담겨 흔들리는 의식에 마침 딱 좋게 부드러웠다. 긴 손가락 끝이 앞머리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앞머리 따위, 평소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짧게 잘라 놓아 신경쓴 적도 없건만. 그런, 아무래도 좋을 것을 야마구치는 귀한 것이라도 다루는 마냥 한껏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간지러웠다. 


"츳키."


속삭이는 소리가 간질간질하게, 드러난 이마에 걸렸다. 

착각이다.


"……츳키."


핏빛으로 어두워진 눈꺼풀 안쪽의 그림자 속, 무언가가 툭, 하고 터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다. 

츠키시마는 헉 하고 숨을 삼킬 뻔 했다, 가까스로 그만두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야마구치가 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눈을 뜨지 않은 채였어도 훤히 보였으니까. 

야마구치 타다시는 평온하게 츠키시마를 내려다보며 그 이름을 불렀다. 불렀을 뿐이다. 

목소리는 변함없이 평온했고, 더없이 상냥했으며, 어조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츠키시마 케이는 그 속에서 확 하고 퍼지는 피비린내를 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마구치의 안에서 무언가가 터진 것이다. 지금껏 품고만 있었을 뿐 결코 깨물려 하지 않았던 독 캡슐 같은 비밀이. 이로 곱게 갈아낸 비밀이 새빨갛게 터지고 흘러, 이제 다시는 깨물기 전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하리라. 

피비린내처럼 짙은 속내의 파편을 흘리면서도 츠키시마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쓸어내리는 야마구치의 손가락은 어디까지고 상냥하기만 했다. 피를 토하듯 사람 이름을 불러놓고서는 그게 제 일부인 듯 담담하기만 하다. 


목이 꼬옥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다. 

야마구치는 그저 츠키시마의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그 앞머리를 쓸고 있을 뿐이고, 나지막히,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츠키시마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지금 집어삼킨 비밀이다. 욕심껏 삼킨 비밀이 목을 꽉 막아, 숨조차 쉬기 어려워진 것이리라.

야마구치는 지금껏 이런 걸 계속 해왔던 걸까. 스스로의 목을 한껏 조여,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뭔가를 기어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그래서야, 만날 때마다 어딘가 죽어있을 법도 했다. 


야마구치 타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시한부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던 무언가는 아마 다른 뭔가의 카운트다운으로 바뀌어 버렸다.

츠키시마 케이는 확신했고―언젠가의, 당장에라도 울어버릴 듯 얼굴을 확 찌푸리던 야마구치의 얼굴을 떠올렸고, 이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라고 납득했다. 

뭔진 모르지만, 아마도 내 탓이니까.

그렇다면 조만간 알 수 있으리라.


"―잘 자, 츳키."


……나 안 자는 거 알고 있었던 거지.

웃음마저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츠키시마 케이는 도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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