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떠올리려 하면 떠오른다. 몇 번을 읽어도 틀림은 없다.
꺼내들 책은 한 권뿐이며, 그 한 권의 책이 나를 증명한다.

아주 가끔, 그 책 위에 먹으로 다른 글귀를 써 넣는다. 엷게 타인의 인생을 뒤집어쓴다. 어디에도 없는 남자의 인생. 어떤 지방에서 태어난, 상인의 싹싹한 아들. 목적을 위해 써내린 일회용의 인생들을. 주인을 위해, 형제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한은 계속해서 뒤집어써왔다. 찢어 버리고, 또 찢어 버리고. 몇 번이고 만들어낸 인생들을 버려 가면서.

한 권인 줄 알았던 생이 조금 두꺼울 뿐인 쪽지 무더기였다는 걸 책을 덮은 뒤에야 알았다.

몸을 숨겨주는 산과 나무 대신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물의 숲. 해는 영영 뜨지 않아, 거리에는 때때로 산짐승들의 안광 같은 불빛만이 번쩍거렸다. 주인을 버리고 난 뒤의 기억이 전혀 없는 생은 몇 번을 떠올리려 해도 지독히 허무했다. 기억 따위, 떠올리기 전까지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건만, 나는 그 와중에도 그 기억에 새겨진 '나 자신'을 찾아 애매하게 헤매고만 있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어중간한 숲에, 어중간한 악한이 하나.

"곤란하군" 청년은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제대로 일할 수가 없는데."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서번트라 함은 말은 좋지만 결국 누군가의 종이다. 도움이 되어야 하고, 쓸모있어야 하는 존재다. 소환되었을 때 어쩐지 모르게 쑤셔박힌 지식이었다. 뭐, 그렇겠지.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누군가의 아랫사람임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모시는 건 생전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연청이란 사내의 인생 중 일정 부분은 '충실한 종자'라는 속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의심을 받더라도, 역경과 고난을 겪더라도, 충심이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주인의 위기에는 몸을 아끼지 않으며, 주인이 원한다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마저도 몸에 새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며, 보기 좋고 유능한 도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그랬다고 기억하고 있다. 전부 만들어진 이야기였다고 하지만 말이지. 신물이 났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건, 제대로 된 자아보다도 제대로 일하기 위한 수단인가?"

노신사는 놀란 듯이 말했다. 전혀 놀라지 않은 듯도 보인다. 군사란 것들은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낭자 연청이 그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기호는 있다. 비하인드 스토리일지, 누군가의 동인 해석일지―아아, 머리가 아프다. 아무래도 좋건만, 아무래도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자신의 감상과 기호 하나하나에 이유와 근거를 따지게 되어 버린다. 피곤한 일이다.

"그야, 자아 같은 것보다도 필요 쪽이 훨씬 더 확실하잖아. 간단해서 좋아. 아아, 뭐―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긴 하지만. 꼭 주인만이 내게 의뢰를 하는 건 아니지. 형제나 동료를 위해서도 일은 해. 술 한 잔이나 좋은 일 하나로 엮인 연에 목숨을 바치는 것―그게 협객이니까. 당신도 그 쪽이 더 편하지 않아? 내 주인이 되는 건 위험할 테니."
"뭐, 어중간하게 지배하려 하면 바로 목이 날아갈 것 같긴 하군."

노신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한 말을 하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흰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하나씩 그 끝을 맞추었다.

"딱한 일이군. 정말이지 어려운 공식이야, 자네는."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나도 당신은 이해하기 어려워. ―하지만 상호이해란 거, 일하는 데 꼭 필요하던가?"
"그럴 리가."

노신사는 웃었다. 눈만은 번쩍이면서. 마음에 안 드는 웃음이었다. 손을 뻗어 저 마른 목을 비틀면 웃음이 멈추리라. 일순 지나가는 비처럼 살의가 스쳤다.

"악을 행하라고 했지. 원하는 대로 망가지고, 망가트리고, 지배하라고. 그거, 생각보다 곤란해. 무법자 짓이라면 좋아하지만, 여기엔 맞서 싸울 압제 따위는 없으니까."

천교성, 낭자 연청은 그런 기호(記號)다. 수많은 이들의 바람이 모여 만들어낸 영웅담 중 하나. 이른바 소망. 압제에 맞서 싸우는 호걸이자,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충직한 하인으로서 만들어진 별이었다.

"차라리 저 늑대처럼 사람이 밉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물어죽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야. 아무래도 하려는 순간에 몸이 멈춰 버리더라고. 아마 존재 자체가 거부하는 모양이야. 그런 건."

어쩌면 좋을까. 군사 나으리. 이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소망이 만들어낸 사상 최악의 악당이여.

"당신을 남을 쓰는 사람이지.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에게 쓸모를 부여해 사용하고, 이윽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부 망가트리는. 말하자면 나와는 정반대의 기호겠지. 당신이라면 내게 줄 답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극약이라도 좋아.
내가 '망가질' 만한 답을.
곤란한 수식이로군. 노신사는 재차 중얼거리곤, 얇은 입술을 올려 웃었다. 계교를 꾸미는 자의 모습이었다. 난제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은 전부 풀고 말 자의 여유였다. 이거 참 악질이구만. 연청은 웃었다. 살기 위해 지혜를 짜올리는 게 아니라 그저 그걸 할 수 있기에, 재미있으니 악행을 저지르는 이를 협객은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저 또한 악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따위 잠시 젖혀 두고, 연청은 혐오를 담아 코웃음치고―동시에 지독히도 안심했다.


                                                                                          *****


책을 꺼내 읽기로 했다.

'자네 속에서 찾을 수 없다면' 노신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타인의 것을 읽거나 훔쳐야겠지.'
악당다운 사고방식이었다. 딱 알맞게 수단도 있었다. 청년은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 듯한 감각으로 타인의 기억을 꺼내들었다. 참고로 삼을 악인 따위 이곳에는 썩어나게 많았기에, 기억은 순식간에 한 권의 책에서 거대한 서가로 탈바꿈했다.

기억은 떠올리면 떠오른다. 몇 번을 읽어도 변함은 없다.
꺼내들 책은 썩어나게 많았으며,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다.

"―음. 어라."

서가의 한 구석, 먼지 쌓인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아니, 애초에 책도 아니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것은 앞표지 뿐. 잘 들여다보니 잘 만들어진 쪽지 뭉치에 지나지 않았다. 편의에 따라 만들어져, 필사적으로 살아온 도구의 생.
제가 인간인 줄 알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줄 알고선 긍지를 가져온 종이 인형의 일생 이야기.

"왜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버리기도 그렇고…어디 구석에라도 치워 둘까."

청년은 툭툭, 낡은 종이쪽지들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먼지를 털어 서가 구석에 감춰 두었다.

"으음. 방화, 방화. 뭔가 괜찮은 것 없던가."

이름을 잃은 악한은 기억의 서가를 맴돈다.
꺼내들 책은 무한대, 그 중 어느 것도 그를 증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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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에 여름이벤트 보고 풀었던 썰이랑 일치하는 거긴 한데, 신주쿠의 신살이는 불려나온 이상 의뢰받은 일은 확실하게 해낸다는 원칙, 그리고 민중의 영웅 같은 걸로 창작되었기 때문에 그 민중을 학대하는 일에는 본능적으로 몸이 멈춰 버리는 속성 사이에서 갈등하다 아예 원래 인격을 잊어버린 뒤 망가지는 쪽으로 해결을 본 게 아닌가 하고 멋대로 망상을 해보았습니다.

여름이벤트의 신살이가 도플갱어가 섞여 있으면서도 되게 깔끔하게 아 그래 일 받았으면 그건 지켜야지 ㅇㅇ 하는 성격이었어서 그럼 왜 신주쿠에선 그따구가 되었는가 하고.

근데 거기에 자기가 픽션이었음을 알아버렸을 때의 짜증까지 섞여서 알 수 없는 게 되어버린...네...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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