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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로키토르]직장에서 로맨스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요?

하름님 리퀘. 리맨물 AU. 형제 아닌 설정으로 신입사원 토르의 사수가 된 로키 이야기.

하름님 리퀘. 리맨물 AU. 형제 아닌 설정으로 신입사원 토르의 사수가 된 로키 이야기. 로키의 동료로 펜드럴이 좀 자주 나옵니다. 불꽃같은 캐붕을 주의해주십시오.

왜 리맨물이 판타지보다 어려울까요.


"Mr. 라우페이슨."

자신을 향하기엔 지나치게 정중한 소리에 로키 라우페이슨은 기계적으로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뭔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제길, 또 야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속으로 온갖 짜증을 다 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로키 라우페이슨의 몸은 마치 오토 매크로를 입력해둔 프로그램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즉, 그는 보던 서류를 즉시 정리해 파일을 덮은 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고―어머나, 젠장. 인사팀 헤임달 씨잖아―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임달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시죠? 뭔가 전달 사항이라도?"

"비서실에 신입사원이 한 명 오게 되어서요. 라우페이슨 씨의 후배가 되겠군요."

한참을 어린 비서실 막내 사원을 향해서도 그의 어조는 흐트러짐없이 깍듯했지만―내용은 부드럽지 못했다. 신입사원이라니, 금시초문이다. 헤임달의 마지막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로키는 지금 자신이 해고 통보를 우회적으로 듣고 있는 게 아닌지를 깊이 의심했을 것이다. …기실 지금도 그 의심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다. 로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우시리란 건 이해합니다만." 로키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금안의 사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흔들림 없이 사람 눈을 똑바로 보는 눈동자가 조금 거북해 로키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 그 시선을 마주하다 보면 정말로 그가 저 눈으로 자신의 속을 읽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하게 되곤 했다.

"여러 모로 사정이 있어서요. 게다가, 비서실에는 일손이 늘 부족하지요. 라우페이슨 씨의 수단만으로 어찌어찌 궁지를 넘기는 건 슬슬 그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짓만은 아닌 말을 늘어놓으며 상대를 추어올리는 게 참으로 교묘하다. 로키가 비서실의 막내 사원이 된 지 어언 2년 하고도 반. 확실히 특정 시즌마다 몰리는 업무 때문에 이를 박박 갈 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하나 더 들여야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무자인 로키 자신이 그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 좋을 건 없겠지. 로키는 새로 올 사람의 이름과, 그가 올 날짜만을 받고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부디 자신의 머릿속에 울리는 온갖 욕설을 저 금안이 꿰뚫어보지 못하기만을 바라면서.

*****

"아, 이번엔 그 쪽인가?"

"이번에는?"

생각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펜드럴은 로키가 상담료 대신으로 건넨 캐러멜 마키아또를 한 모금 호륵, 마시곤 진저리를 쳤다. 너한테 메뉴 선택 맡기는 거 아니었어. 이 스위츠 킬러가. 그러나 그는 불평을 내뱉으면서도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전에 한 모금 더 내용물을 들이켰다. 입으론 거부하는 척 해도 몸은 정직한 법이다. 당분과 카페인은 직장인의 넥타르이니. 

"하던 말이나 마저 해 봐. 이번에는, 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야? 난 신입사원이 온다는 소리밖엔 못 들었다고."

"어, 음. 뭐. 그냥 소문 수준이라 확실하지 않긴 한데."

"됐으니까 얼른 말하지 않으면 지금 들이킨 걸 도로 컵에 뱉어내게 만들어주겠어."

"여전히 거친 말을 뱉는 입이로군. 이렇게 입술이 곱건만."

"플러팅을 넘어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도 어쩜 이렇게 사람을 안 꼴리게 만들 수 있냐."

"백 퍼센트 진심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와이셔츠, 커피색으로 물들여줄까?"

"여전히 자극적이군. 그런 거 싫어하진 않지만…뭐, 농담은 이쯤 해두고."

펜드럴은 와이셔츠를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듯 양복 외투 자락을 슬쩍 여미며 화제를 돌렸다. 하여튼 사람 신경 건드리는 포인트를 교묘하게도 잘 피해가는 남자다. 

"도널드 블레이크랬지. 뭐,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겠지만―그런 이름의 신입사원이 있었거든. 우리 쪽 건물에도."

"'있었다'니?"

"예상하시는 대로,  지금은 없기 때문이지."

"뭔가 문제라도 일으킨 거야?"

"우리 부서는 아니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조용한 친구란 이야기를 들었거든. 아, 중요한 건 여기서부턴데―"

펜드럴은 주변을 슬쩍 돌아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기밀 정보를 흘리는 정보원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지만, 그 눈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쓰잘데기 없지만 아예 무시할 법한 정보는 아니란 소리다. 그런 거 별로인데. 로키는 단정한 눈썹을 찌푸리곤 슬쩍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건물마다 한 번씩, 비슷한 식으로 신입사원이 왔다가 사라졌다더라고. 요 반년 사이에."

…뭐야 그게. 무슨 오래된 건물마다 있다는 유령 이야기도 아니고. 신입 사원이라니. 그런 거 어차피 있다가 사라지고 있다가 사라지고 괜찮으면 붙어있고 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로키는 일순 소름끼치는 가능성을 떠올려냈다. 비서실이 있는 건물은 회사의 다른 건물들과 떨어져 있어, 소문 이야기에는 자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걸 노려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골칫덩이 신입사원을 비서실에 떠밀려 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떨어지려 하는 게 아닐까. 로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엄청나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어."

저번 달에 할부로 지른 구찌 신상 수트만 아니었다면 꽤 진지하게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부 기간이 아직 6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적어도 6개월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로키 라우페이슨은 회사의 충실한 노예로 살아가야 했다. 신상과 할부와 카드명세서의 이름으로.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로키는 음울한 눈빛으로 부모의 원수를 쳐다보듯 커피잔 속의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그게 약 사흘 전의 일이다. 로키는 기나긴 회상에서 깨어나 제 앞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았다. 하느님 맙소사. 어디 가서 체구로 뒤져본 적이 거의 없었건만. 189…아니, 190을 조금 넘을까? 기실, 키로만 보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터였으나 남자의 몸은 탄탄한 근육에 덮여 있어, 로키보다도 훨씬 더 체구가 커 보였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쓰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헤임달에게 미리 사람이 올 것이라고 들어두지 않았더라면 로키는 그가 비서실에 새로 온 사람이 아니라 새로 자사 제품의 광고 모델을 맡기로 한 운동 선수나 무언가로 생각했을 것이다.

"도널드 블레이크입니다." 

로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발의 사내는 금빛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깊은 물처럼 푸른 눈동자에 엷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맙소사. 죽을 만큼 부끄러운 표현이긴 했지만, 정말로 그랬다. 카리브의 바다 같은 푸른 눈에 야자수 잎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어쩌구저쩌구 하는 그거. 로키는 제 키가 그와 비슷할 정도로 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저 얼굴을 근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189센티미터의 신장에는 의미가 있었다. 펜드럴 망할 놈. 이런 악마가 내린 듯한 핫가이란 이야기는 안 했잖아.

"반갑습니다, 미스터 블레이크." 다행히도 속내를 감추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제 속에 울리는 환희의 송가가 눈앞의 미남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로키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투박하게 큰 손이 그 손을 감싸쥐었다. …내 손에 지금 땀 나는 건 아니겠지.

"손힘이 좋으시네요. 뭔가 운동이라도?"

"아, 죄송합니다. 힘이 너무 들어갔나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취미로 서핑을 좀 했습니다."

"오슬로에선 하기 힘든 취미였겠군요. 뉴욕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딱히 플러팅처럼 들리진 않았겠지. 로키는 설산의 조난자처럼 깜박깜박 잠들려 하는 제 이성을 필사적으로 후려쳐 깨우고 있었다. 정신차려. 여긴 게이바가 아니야. 여긴 회사고 나는 지금 근무중이고 쟤가 아무리 당장 호텔 방 잡아 자빠트린 뒤 꼬시고 싶을 만큼 취향이라지만 후배 사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잘리고 싶지는 않다고. 여우 같은 할부금과 토끼 같은 신상들을 생각해. 정신차려. 죽으면 안 돼.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니까, 내 이성! …기타 등등. 그렇게 난 이제 틀렸으니 두고 가라는 이성을 흔들어 깨우느라 바빴던 탓이다. 로키는 대체 이, 눈동자에 함초롬하게 제 속눈썹 그림자를 드리우는 청순 금발 거구 미인이 대체 무엇 때문에 수많은 부서를 전전하며 흘러흘러 이곳까지 왔을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 문제라도 일으켰나?"

로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배를 잡고 깔깔대며 구르던 펜드럴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럼 부서 이동이 아니라 해고를 당했겠지. 우리 회사 그런 쪽에 철저한 거 알잖아."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동요해서 일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다거나. 엄청난 미남이라며?"

"우리 부서야 할배들 뿐이라지만, 네가 멀쩡하게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런 건 말도 안 되고."

…실수했다, 제길. 말하자마자 아차 싶어 혀를 찼지만 이미 늦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로키는 지금쯤 펜드럴이 환하게 웃음짓고 있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좋단다. 그러다 울겠다, 인마. 펜드럴은 손가락으로 로키의 머리카락을 한 줌 집어 거기에 가볍게 입맞췄다. …취했다곤 해도 옛날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짓을 참 잘도 한다 싶었다. 

"네가 날 그렇게 봐준다니 영광인데. 역시 운명이 느껴지지 않아?"

"네가 오늘이라도 성향 바꿔서 나한테 엉덩이 대 줄 의향이 있다면 그 운명이란 걸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립글로즈 묻으니까 좀 치워봐. 머리카락이 뭉치잖아."

젠장. 전혀 아쉽지 않은 듯한 탄식과 함께 잘생긴 얼굴이 뒤로 물러났고, 로키는 코웃음을 쳤다. 브루넷의 늘씬한 미인을 좋아하는 바이와 금발의 몸 좋은 미인을 좋아하는 게이인 두 사람이 지금껏 붙어먹지 못하고 바에서 술친구나 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좀 어이없지만―둘 다 줏대있는 탑이었다. 처음 만난 날 호텔에 방까지 잡아뒀다가 마지막에 저것 때문에 식어 주섬주섬 옷을 입곤 아침이 올 때까지 죽어라 퍼마셨더랬다. 말은 저렇게 해도 펜드럴 또한 미련은 한 톨도 안 남았으리라. 

"뭐, 어쨌든 조심해야겠지. 아무리 먹음직…아니, 호감이 간대도 뭔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똑같이 사고를 쳐도 배 나온 아저씨보다는 이쁜 애가 그래도 좀 더 뒤처리하기 낫긴 하겠다마는."

로키는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처음엔 둥글었던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아래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슬아슬하군. 그리 중얼대며 술잔을 한 바퀴 빙글 돌린 순간, 얼음은 그대로 홱 뒤집혀, 잔 아래로 가라앉았다.

*****

처음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의문의 신입사원은 꽤 무난하게 잘 해나가고 있었다. 딱히 성격이 괴팍하지도, 치명적으로 뭔가를 못해 눈에 띄거나 하지도 않았다. 신입사원 특유의 어설픔은 있을지언정, 한 번 가르쳐주면 금방 이해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금방금방 물어오곤 했다. 그,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블레이크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눈에 띄게 유능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능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 이 인간이 대체 언제 사고를 치기 시작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로키도 이내 조금씩 경계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로키는 조금씩 나눈 대화를 통해 이 묘한 사내가 원래 천문학을 전공했으며, 박사 과정을 밟다 집안 사정 때문에 이쪽으로 돌아왔으며, 로키보다 세 살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내가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는 사실도. 차라리 일이라도 못하면 그 탓에 질리기라도 하련만, 그가 때때로 치는 사고들은 그가 짓는 수줍은 미소 한 번에 바로 정산되고 오히려 거스름돈이 남을 만큼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펜드럴은 이 말을 듣자마자 어째서인지 '이 녀석, 틀렸군.' 하고 혀를 끌끌 찼다―기실, 그 날의 사고도 그러했다. 

요상하게 비서실에 일이 많이 몰리는 날이었다. 때때로 있는 일이다. 도널드 블레이크 씨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서류 러시에도 꽤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 로키는 육성으로 욕을 뱉고 싶어지는 수많은 순간들을 눈앞에서 바삐 뛰는 미남의 엉덩이를 보며 넘겼다. 아이캔디 만만세였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지는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중, 로키는 벼락처럼 내리는 계시를 들었다.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었다. 지금 일어나서 복사실로 달려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돌아가신 조상님이 도우셨는지, 아니면 집안 옷장의 올 블랙 구찌 수트가 도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로키는 그대로 일어나 복사실로 날듯이 달렸다. 덕분에 그는 도널드 블레이크 씨가 팩스 기기를 완전히 작살내는 걸 어찌어찌 막을 수 있었다.

그 경고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일부분도 작살나지 않고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팩스 기기가 중간에 멈췄다고 해서 종이를 그냥 뽑으려 들면 안 되지요. Mr. 블레이크."

"……죄송합니다."

"뭐, 저놈의 기기는 조금만 요청이 몰리면 지랄맞게 울어대면서 붕붕 떨다 멈춰버리기 일쑤고, 올 서류는 많았으니 마음이 급했다는 건 이해합니다만―다음부턴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절 부르세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로키는 미간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금발 미남이 움찔 떨면서 커다란 몸을 움츠렸다. 젠장, 귀엽군. 로키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움찔, 커다란 등이 거기에 맞춰 한번 더 떨었다. 아, 역시 귀엽다. 로키는 미간을 쓸어내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입술 양 끝이 절로 올라가려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만, 종일 서류와 씨름하느라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상황에선 그 얼굴이 꽤 무서워 보였던 모양이다. 도널드 블레이크 씨가 슬쩍, 시선으로 눈치를 살펴오는 게 보였다. 그 모양이 은근 재미있어, 로키는 이 사내에게 진실을 가르쳐주는 걸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했다. 예를 들면 비서실의 팩스는 전부터 저거 언제 죽나 하고 다들 이를 벅벅 갈고 있는 물건이었기에 오늘 망가졌다 해도 다들 그리 신경쓰지는 않았을 거라거나. 지금쯤 안에선 수리 기사를 부르는 것보단 그냥 새 물건을 사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을 터란 사실 말이다. 기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위에 설명하고, 밀린 팩스를 다른 데로 돌리는 데에 아주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었으니까.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다입니까? 뭔가 보여주는 게 있어야지."

로키가 짐짓 심술궂게 그리 말하자, 예쁜 눈이 의문을 담아 데록데록 굴렀다. 기실, 심술궂게라곤 해도 저도 모르게 웃음기가 섞여 버려, 당초 생각했던 어조보다 꽤나 둥글어져 버렸다. 어느 정도 눈치란 게 있다면 로키가 정말로 화난 건 아니라는 게 바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저, 그럼 어떻게 하면……?"

……어쩜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직장. 쟤는 후배 사원. 신상과 할부와 카드명세서의 이름으로 아멘. 이 사내와 만난 뒤 거의 기도문처럼 달달 외워 왔던 주의 문구를 한 번 더 속으로 외곤, 로키는 큼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마침 금요일이고, 오늘은 피차 고생했으니, 같이 술이나 한잔 하죠. 첫 잔은 Mr. 블레이크가 사는 걸로."

 사내의 얼굴이 오늘 들어 처음으로 환해졌다. 분명 저보다 세 살이나 연상에, 박사 과정까지 밟다 온 사람일 터였건만 사람 말 한마디에 표정이 휙휙 변하는 것이 귀여웠다. 칭찬받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표정이었다. 몇 번이고 본 엉덩이였을 터임에도, 로키는 일순 이 사내의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있지는 않았던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둘이 향한 곳은 회사 근처의 그럭저럭 괜찮은 펍이었다. 퇴근 후의 회사원이 주로 갈 것 같은, 조금은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곳. 어느 정도 술 취향이 잡힌 이후론 로키가 절대로 가지 않게 된 부류의 가게다. 라임 한 조각을 올린 데킬라 슬래머를 들고 오는 도널드를 보며 로키는 이 사내와는 절대로 술 취향이 안 맞으리라고 확신했다. 대체 오슬로에서 공부하고 온 인간이 무엇 때문에 데킬라에 맛을 들인단 말인가. 물론, 그렇다 해서 로키가 자주 가는 가게에 이 사내를 끌고 가는 건 언어도단이었다. 여기는 직장. 쟤는 후배 사원. 퇴근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마시는 데킬라와 럼 콕과 맥주는 생각보다 마실 만했고―대체 어떤 페이스로 마셔야 할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도널드가 마치 물 마시듯 술을 들이붓고 있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건 그저 가게가 시끄러워서 자신도 안 어울리게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해야 했다는 것과, 계속해서 술병이 테이블에 날라져 왔다는 것과. 늘 수줍게 눈썹을 내리깔며 웃던 남자가 어째서인지 이 술집에선 바이킹 전사가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호쾌하게 술을 비워대며 호쾌하게 웃어대었다는 것 정도. 그리고. 또 뭐였더라.

―비밀이 있다고요?

―우연이네요, 나한테도 있어요. 비밀. 

예쁜 멍멍이 같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문득 요염하게 훗, 하고 미소짓는가 싶더니. 굉장히 가까이 다가와서.

―내 비밀을 알려주면, Mr. 라우페이슨도 비밀을 이야기해줄 건가요?

―좋아요. 기대하고 있지요. …로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떻게 도착했는지 자기 방 침대에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여서, 입고 있던 양복이 주름투성이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좆됐다."

로키는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로키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 주말이 지난 다음의 아침이었다. 

"―토르 오딘슨입니다."

평소에 입던, 조금 싼티나는 기성품 대신 문외한이 보아도 고급임을 알 수 있는 맞춤 양복을 몸에 걸친 채, 분명 금요일까지 도널드 블레이크였던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로키는 작게 혀를 찼다. 젠장. 왜 진작 몰랐지. 그리고 그건 로키의 앞에 서 있는 다른 네 명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토르 오딘슨이라 자신을 소개한,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던 사람이었던 이가 설핏 웃었다. 그 표정만큼은 그래도 자신이 알던 때와 비슷했다.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뭔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회장님 아들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퉁명스레 말한 사람은 기획부의 시프 대리였다. "고작해야 임원진 친척 중에 일자리 찾는 도련님이 있는 모양이다 싶었지요. 그래서, 이건 뭘 위한 서프라이즈 카메라였죠?"

"원래는 경영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이쪽 사정에는 신경 끄고 지냈거든요. 회사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고 싶어서 헤임달 씨에게 좀 무리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토르는 제 앞에 선 다섯 명의 사람을 둘러보았다. 인사부의 호건, 기획부의 시프, 마케팅부의 펜드럴과 현장관리팀의 볼스타그. 그리고 비서실의 로키. 잘생긴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났다.

"같이 일하면 즐거울 것 같은 사람들도 찾고 싶었고."

로키는 입을 딱 벌렸다.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게 거대한 신데렐라 프로젝트였다는 거야? 회장님 아들의 직속으로 일할 영광스런 신인을 뽑습니다? 펜드럴이 슬쩍 저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동정이 섞여있는 게 배알이 꼴렸다. 밖이었다면 그대로 걷어차 주었을 텐데. 로키는 토르를 쏘아보았다. 여긴 직장, 나는 회사원. 할부와 신상과 카드명세서의 이름으로, 이름으로―이런, 빌어 처먹을.

"이건 사기잖아요!!"

"무슨 소리죠, Mr. 라우페이슨? 오히려 약속을 지킨 건데."

그건 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대거리하려 하는 로키의 머릿속에 지난 주의 기억, 아니 정확히는 그 단편이 훅 떠올랐다.

―비밀이 있다고요?

―우연이네요, 나한테도 있어요. 비밀. 

"사실 조금 더 있다가 밝힐 생각이었습니다만, 마침 타이밍이 좋은 것 같아서 말이죠."

―내 비밀을 알려주면, Mr. 라우페이슨도 비밀을 이야기해줄 건가요?

―좋아요. 기대하고 있지요. …로키.

척척, 토르는 경쾌하게 로키의 앞으로 걸어오는가 싶더니, 싱긋 미소지으며 제 얼굴을 로키에게 가까이 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그쪽도 기대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로키." 

그는 그대로 로키를 지나쳐 방을 나섰고, 방 안은 술렁임에 가득찼고, 다른 네 사람의 시선이 로키에게 꽂혔지만―그 모든 것이 지금의 로키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걸 과연 커플링 소설이라고 봐도 좋을까요. 저 토르는 대체 누구일까요…근데 아무리 그래도 사회인인데 존댓말 안 쓰게 하는 건 너무 싸가지 없어 보였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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